대공황과 전쟁이라는 시대를 배경 삼아 모더니티의 황폐한 자화상을 그려낸 장르인 누아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아직도 유효하다. 많은 감독들은 영화적 영감으로서의 고전 누아르를 부정하지 않으며, 영화 포스터에 툭하면 등장하는 '누아르'라는 관용구도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상업적 효용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런 범람 앞에서 하드고어 누아르 팬들은 오히려 야릇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아르라는 단어만큼 원의미에서 벗어나 변주되고 왜곡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누아르에 대한 오해의 배경에는 아마도 단어의 대중성만큼 실제 작품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소비구조에 기인한 바가 클 텐데, 여기에는 마니아 위주로 형성되어 온 시장구조와 B급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상업적 가능성을 간과하였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무관심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중 누아르에 대한 판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워너, 유니버설, 폭스 등이다. 이중 워너는 DVD 발매 초기부터 누아르의 교과서적인 걸작들을 꾸준히 발매해왔고, 최근에는 지명도가 낮은 작품들을 묶어 박스로 발매하는 기민함을 보이고 있다. 자사의 고전 명작을 '폭스 스튜디오 클래식스' 시리즈로 발매하여 고전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확보한 폭스는 워너의 누아르 라인업에 고무받은 듯 창고에 잠자고 있던 자사의 누아르를 '폭스 필름 누아르'란 시리즈로 작년 봄부터 분기당 세 작품씩 꾸준히 발매하기 시작하였다. 오토 프레밍거의 기념비적 심리미스터리 <로라>를 필두로 발매되기 시작한 폭스의 시리즈는 감독의 명성과 작품의 지명도에선 워너에 밀리지만, 프레밍거나 헨리 해서웨이와 같이 누아르 전성기를 장식했던 장인들의 탄탄한 기본기가 돋보이는 작품과, 지명도는 낮지만 진정한 B급 정서로서의 누아르 스타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을 조화시킨 라인업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발매된 해서웨이의 <죽음의 키스>, 프레밍거의 <인도가 끝나는 곳>과 초기 발매된 풀러의 <대나무의 집> 등은 폭스의 이러한 전략을 잘 보여주는 라인업으로, 이미 '스튜디오 클래식스'에서 보여준 복원실력과 함께 오리지널 음성트랙의 보존, 전문가의 음성해설 제공 등의 일관적인 행보는 시리즈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고전 누아르의 상업적 잠재력에 대한 폭스의 믿음에 대해 누아르 마니아들은 지지와 관심을 쏟고 있는데, 올 첫 라인업으로 프레밍거의 <추락한 천사>, 맨케비츠의 <노 웨이 아웃> 등 잊혀졌던 누아르 소품들의 출시가 다음달로 예정되어 있어 누아르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