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이 이름 석자는 소싯적 우리의 일요일 아침을, 말 그대로 ‘지배’하는 이름이었다. 요즘 같이 각종 채널 사방에 범람하기는 커녕 전세계에 TV 채널이 딱 3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그 시절에, 설날도 크리스마스도 아닌 그냥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어준 최고급 디즈니산 만화는 대박 중의 대박일 수밖에 없었다. 도날드에서부터 밤비까지 아우르는 그 다채로운 레퍼토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드높은 공력은, 디즈니의 로고에 성채가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랬다. 당시 디즈니는 말 그대로 왕국, 그 자체였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때는 바야흐로 2천하고도 6년. 오직 픽사의 깃발만이 홀로 나부끼는 미제 애니메이션 판에, 디즈니가 자체 제작한 최초의 3D 컴퓨터애니메이션 <치킨 리틀>이 나타난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분당 약 -90원, 즉 영화를 끝까지 관람할 시 -90원 × 80분=-7200원가량의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는 그 극악무도한 완성도를 젖혀두더라도, <치킨 리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극도의 실망을 안기기에 충분했던 바, 그중 최고봉은 단연 당 영화를 통해 드러난 디즈니의 처신이다.
온 동네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픽사라는 회사에 모여 3D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터를 닦아 나갈 때, 걔네들의 작품을 날름날름 가져다 유통마진을 챙기던 중 이제껏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먹여살려온 픽사가 떠나가자, 뒤늦게 화들짝 놀라 자신들도 3D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며 떨쳐 일어선 디즈니. 물론 나름대로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잠시 ‘애니메이션에 컴퓨터가 어찌!’라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동안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은 변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니메이션 판은 연필과 종이가 아닌 컴퓨터와 타블렛이 좌지우지하게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나 필자의 생각으로, 기왕에 전통적인 2D애니메이션을 고집했으면 그 끝을 봤어야 했다. 중요한 건 ‘셀애니메이션이냐, 컴퓨터애니메이션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가 아닌가 말이다. 만일 디즈니가 때늦은 3D애니메이션이 아닌 셀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췄다면, 적어도 픽사 애니메이션의 아류를 만드는 따라쟁이적 추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젼차로, 아무런 앞뒤도 내용도 감흥도 알맹이도 없이 오로지 ‘우리도 3D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데…’라는 사실을 주장하기만 하던 <치킨 리틀>은, 필자에게 단순히 재미없는 영화 한편을 본 것 이상의 타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적었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가는 것은,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라고. <치킨 리틀>은 이를 더없이 명확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