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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나는 그림책이 좋다
김현정 2006-02-17

내가 어릴 적에는 그림책이라는 물건이 없었다.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가져보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책은 국민서관에서 나온 딱딱한 표지의 동화책 전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황스럽게도, 삽화가 아니라 단추처럼 생긴 눈과 털실로 땋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 사진이 있었다. 혹시 그 전집만이 고집한 독창성이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헨젤과 그레텔이 쌍둥이도 아니고 똑같이 생긴 인형에 짧은 털실 다발을 씌운다고 하여 누이동생이 오빠가 될 수 있는가 말이다. 하긴, 눈이 단추만 하고 눈썹도 없으니 얼굴이 달라지려야 달라지기도 어려웠다.

세월이 흘렀고 방구석엔 여전히 가난이 앉아 있었지만 나는 집안에 있는 책을 모두 읽어버렸다. 침울해하는 큰딸을 보며 엄마는 마치 큰 결심했다는 듯 일어나더니 단칸방 장롱 위에서 책상자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 상자 안에는 초등학교 5, 6학년용이라고 버젓이 씌어 있는 계몽사 아동문학 전집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형편이 어려운 친척이 부탁하여 언제 꺼내볼지도 모르는 그 전집을 샀던 것이다. 그 책엔 드문드문 조악한 흑백 삽화가 실려 있었지만 나는 그걸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안데르센의 동화 <그림없는 그림책>의 제목이 그리도 슬프게 느껴졌던 걸 떠올리면. 정작 그 동화가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생각도 안 난다.

그 뒤 나는 언제나 문자와 더불어 살아왔다. 처음으로 집이 생겨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야 엄마는 중학생 딸에게 일러스트레이션씩이나 들어 있는 세계사 전집을 사주었지만 그림을 모르고 자란 나는 이미 글자벌레가 되어버린 뒤였다.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는 글자들에 파먹혀 광인이 되어버렸다… 고 하면 거짓말이겠고, 오랫동안 보는 즐거움을 모르는 채 읽기만 했으니, 빛과 색이 만들어내는 영상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상하다. 나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왜 영화기자가 되었을까. 미술을 기반으로 하여 영화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건, 내겐 다음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가능하기나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지난해이던가, 나는 가끔 그림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림책은 읽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글자와 그림이 한 덩어리로 엉켜서 그대로 삼켜버려야만 한다. <깊은밤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멘트 바른 살풍경한 부엌에서 자란 나는 알게 뭐냐 싶었겠지만, 지금은 빵이 되어버릴 뻔한 꼬마와 함께 꿈을 꾸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으로 그림을 만지곤 한다. 나이 서른에 <사기열전>이 너무 비싸다 한탄하면서도 그보다 비싼 그림책을 사들이는 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일 것이다…라는 게 진부한 해석이 되겠다.

나는 그저 그림책이 좋다. 상처 따위는 없다. 삽화라고는 없었던 <왕도둑 호첸플로츠>가 너무 재미있었고 지금은 영어를 읽을 수 있기에 번역되지 않은 그림책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취향이 떳떳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보기 좋은 그림만 보여주면 헤벌쭉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스스로 단세포라 자학해왔고, 경멸하듯 바라보는 동료로부터 “실망이에요. 이제 현정씨하고 안 놀 거예요” 따위의 비난도 얻어들었지만, 새로 산 로버트 사부다의 공룡 팝업북을 어루만지며, 나는 이제 부끄럽지 않다. 나는 예쁜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