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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싶은 거짓말 <궁>의 참을 수 없는 매력 [1]

대한민국이 난데없이 황족타령이다. 네이버 지식인에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이 살아 있나요?” 같은 질문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서점에서는 ‘궁’에 관한 책들이 팔리기 시작했다. 온기를 잃은 겨울 궁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공주나 쓸 법한 왕관모양 머리핀이 팔려나간다.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발칙한 설정으로 시작되는 MBC 드라마 <>은 질적인 완성도나 대중적인 호응을 떠나서 일단 그 설정만으로도 분명 ‘센세이셔날’한 기획상품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은 단순히 <풀하우스> 같은 ‘만화 원작 드라마’나 <다모> 같은 ‘퓨전사극’으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모자란 α의 매력이 더 있다. 학원로망에서 궁중사극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장르, 10대에서 중·장년층까지 휘어잡는 세대적 포용력, 거기에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면서 품위있는 볼거리까지 제공하는 이 드라마의 기막힌 균형미의 비밀을 살펴보자.

좌우당간 그렇다고 치자, 라고 드라마는 시작한다. 2006년 현재 대한민국에 황태자가 있다고, 한번 믿어보시라니깐요, 라며 귀를 간질인다. 일제 해방 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성조가 귀국을 했고, 여론의 요구로 황실이 복권되었다고, 성조의 황제즉위 뒤 명예 입헌군주제 아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1945년을 광화원년으로 하여 이 나라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시침 뚝 떼고 말한다. 성조붕어 뒤,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즉위했고, 1993년을 인화(仁化) 원년으로 하며 현재 인화 14년에 이르렀다고, 도표까지 그려가며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케이블TV에는 황실채널이 있고, 왕립고등학교와 왕립미술관이 존재하며,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르는 ‘황’색저널(이 그럴듯한 말의 조합이라니!)이 궁 주변을 떠나지 않고, 학생들은 연예인 대신 황태자의 얼굴로 책받침을 만들고, 인터넷에서는 ‘황폐’(황실폐인)가 만들어지는, 좌우당간 그게 대한민국이라고, 이 드라마는 주장한다. “이 싸~람들이 증말!” 뻥이라면 따라올 자 없는 <마이걸>의 주유린도 기막혀할 참 대~단하신 ‘구라’다.

돌아보니 주인없궁 있다하면 불만있삼?

원작 만화 <궁>

이 드라마의 제목은 <>이다. ‘궁’이라니 참 멀기도 먼 단어다. 학교 졸업하고 안 가본 사람이 더 많을, 가깝지만 먼 그대다. 원작 만화 <>의 박소희 작가는 이 점을 주목한다. “주인을 잃은 채 쓸쓸히 비어 있는 우리의 궁궐에 숨기운을 불어넣고, 낡고 쓸쓸한 고궁 대신 늘 왕족들의 바쁜 일상사로 가득 찬 활기찬 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녀는 학창 시절 우연히 떠올렸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어린 나이에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궁으로 시집 오게 된 고등학생 채경과 냉정하고 도도한 황태자 신의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일단 그 신선한 발상 하나만으로도 드라마나 영화쪽에서는 탐내는 사람이 많았고, 겨우 4권의 만화책이 나왔을 때(현재 11권) 드라마 제작계약이 이뤄졌다.

실로 드라마에서 패션쇼 하듯 화면마다 바뀌는 채경의 퓨전한복들은 어설픈 드레스보다 예쁘고, 우리 고유의 문양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으로 만들어진 집기들을 보고 있자면 민망하게도 한국의 것들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실감하게 된다. 동과 서, 현재와 과거가 조화롭게 어울린 궁중은 살아보고픈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 공간이다. 어쩌면 KBS 다큐멘터리에서 몇 십년 전에는 이야기했을 “격구 같은 놀이가 서양의 골프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드라마를 통해서 들으니 새삼 알게 되는 재미난 상식이다. 서울에 더이상 찍을 곳이 없다며 점점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촬영카메라가 놓치고 지나간 곳. 결국 <>은 ‘궁’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둘러싼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틈새시장과 사각지대를 개척한 셈이다. 실로 드라마계의 비락식혜 같은 발견인 셈이다.

재벌귀족 강퇴요망 황족혈통 은근완츄

그러나 이 드라마, 한 꺼풀 벗겨보면 별로 새로울 건 없다. 아빠는 전업주부에 엄마는 생활설계사로, 게다가 보증 잘못 서서 빨간딱지까지 덕지덕지 붙은 집구석의 여자아이가 어느 날 황태자비로 간택된다는 이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간 수많은 드라마에서 나왔던 재벌귀족들과 가난한 여자의 러브스토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파놓은 함정은 다른 데 있다. 부자가 부자를 낳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자본주의의 슬픈 뒷모습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드라마가 되어 눈앞에 펼쳐지면 시청자들은 패배감을 느낀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조건들로 여자를 얻고 거기에다 사랑까지 쟁취한다면 부러운 동시에 배가 아프다. 그러나 <>엔 모든 것을 상쇄시키는 조건이 있다. 바로 ‘21세기에도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오직 한 집안만이 할 수 있는 변명, 황족인데 어쩔 테냐, 다.

재수없는 재벌아들은 닳고 닳은 돌림노래지만, 재수없는 ‘황태자’는 처음이다. 캔디 같은 가난쟁이 아가씨들은 재방송에 VOD 서비스까지 마쳤지만, 캔디 같은 ‘황태자비’는 처음이다.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황족’이라는 간단한 장치 하나만으로 <>은 무엇이든 처음인 드라마가 된다. 오히려 신(주지훈)은 ‘평민 출신’ 채경(윤은혜)을 두고 뒷말을 하는 재벌아이들에게 “너희 같은 진골이 성골이 되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며 일침을 가한다. 부자나 권력자들 상위에 있는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갈망, 그렇게 <>은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부나 권력에 대한 열패감과 반항심을 슬며시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으며, 서민들을 위한 교묘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학원로망 화산예고 열공대신 열애하세

회당 제작비가 무려 2억2천만원이 넘는다는 규모의 스케일을 제외하고도 <>은 단순히 ‘만화 원작’이라는 카테고리에만 묶여 있기엔 매우 복답다단한 드라마다. 무용소녀와 영화소년, 미술소녀와 디자인소년이 나오는 핑크빛의 학원 로맨스물인 동시에 엽기적인 친구들이 황당한 대사를 풀어놓거나, 주인공 스스로가 코믹을 연출하는 학원코믹물인 <>은 사실 알고보면 <화산고>에 가깝다. 드라마 속 학교에는 ‘황제’라는 평생직장이 담보된 황태자 신이나, 황태자 비가 된 채경, 신을 둘러싼 재벌집 자식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친구 히숭, 순영, 강현 같은 아이들에게서도 입시의 그늘이나, 대학에 대한 스트레스는 찾아볼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하자”는 급훈이 쓰여 있을 자리에 “우주정복”이란 4글자가 박힌 저 교실은 분명 다른 별이다. ‘열공’ 대신 ‘열애’가 가능한 대한민국 고등학교를 그려내는 <>은 진정 학원SF다.

이렇듯 ‘스타워즈’성 학원물의 재미를 계속 가져가면서도 <>은 <어린 신부>와 같은 ‘십대부부’에 대한 로망을 부채질한다. 그것을 꿈꾸는 10대나 이제는 다시는 못해볼 1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도 ‘어린 부부’라는 허락된 불장난이 가지는 판타지가 있다. 혼례 뒤 법이 허락했지만, 도리가 허락하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스킨십. 이미 장성한 육체들의 수줍은 넘나듦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우심방좌심실이다. 그렇게 와락 안아주고 싶은 저 등을 뒤에서 한번 부여잡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온도는 훌쩍 천도쯤 올라간다.

청춘의덫 따로있나 알고보니 여인천하

그러나 이렇게 눈에 하트를 그리는 동안 드라마는 그저 소년·소녀용 비현실적 학원물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어른들의 약조이고,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이라고 하나, ‘21세기 소녀’ 채경이 결혼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꽤나 현실적이다. 물론 혼기 꽉 찬 ‘김삼순’이라면, 허우대 멀쩡하고 잘생긴 남자가 제발로 굴러들어와 결혼까지 하자는데 마다하지 않겠지만, 아직 꽃다운 나이에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소녀로서는 졸지에 유부녀라니 대략난감한 시추에이션인 거다. 여기서 채경이 결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돈과 가족 때문이다. 농담처럼 “내 인생의 모델은 <청춘의 덫>의 이종원이야”라고 외치는 이 아이는 결혼 뒤 “소녀재벌”이 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종종 성인드라마에서 갈등요소로 등장했던 부에 대한 갈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법적 결합이 사랑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세대임을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이 ‘외계어’를 쓰는 10대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장년층 시청자들을 잡아끄는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가 가지는 사극적인 재미 때문일 것이다. 과거 <여인천하>류의 사극이 장수했던 비결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왕좌를 둘러싼 암투와 모략이다. ‘학원로망’을 펼쳐나가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전사(前事)가 있었으니 바로 황제 이현(박찬환)과 황제의 죽은 형 이수(김상중) 그리고 혜경궁 화영(심혜진) 사이의 삼각관계다. 화영은 원래 둘째 이현의 연인이었으나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이현을 버리고 첫째 이수에게 접근해 결혼한다. 그러나 황태자비로서의 기쁨도 잠시, 남편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권력의 판도도 바뀌어버린다. 결국 아들 율(김정훈)과 궐 밖으로 나가 영국에서 살던 그녀는 황제의 병환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은 남편을 황제로 추존시키고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귀국한다. 대신 21세기의 ‘여인천하’엔 암투와 묘략 대신 “여론과 언론”을 이용하는 차별화된 전략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에 색다른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의 이야기가 점차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극의 진행에 따라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뒤섞이면서 기막힌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완전소중 궁중세트 명품화면 멋지구리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박소희의 원작 만화 <>의 팬들은 황태자 신 역을 맡은 신인 주지훈과 가수에서 연기자로 자리바꿈한 채경 역의 윤은혜의 캐스팅을 놓고 한참 말이 많았다. 물론 방영이 시작되면서 캐스팅에 대한 안티는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은 여전히 보는 이들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할 드라마다. 그러나 <>을 둘러싼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있으니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세트, 섬세한 미술과 품위있는 화면에 대한 감탄이다. <춘향뎐>과 <혈의 누>의 민언옥 미술감독과 서정적인 화면연출의 대가인 황인뢰 감독이 만들어내는 <>의 비주얼은 이야기의 발랄함과는 상관없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치 <세대공감 올드 앤 뉴>처럼 출연자들은 까불고 춤을 추는 가운데서도 화면과 미술은 노현정 아나운서처럼 중심을 잡고 앉아 드라마의 품격을 유지한다. 그러다 가끔씩 궁중법도나 예의를 가르치며 “공부하세요”라며 깔때기를 내리친다. 알맞게 뒤섞인 퓨전 궁중요리며, 엑스트라들이 부딪힐까 진땀을 뺀다는 몇 억원을 호가하는 소품 하나하나까지, 전체적인 화면톤을 고려해서 배치된 근경의 요소들은 고습스러운 원경으로 기억된다.

또한 이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한국 드라마의 HD카메라(궁에서 사용된 것은 소니 HDW-F900) 사용은 이제 자신만의 고유한 데이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을 본 일본쪽에서는 도대체 어떤 세팅값을 써서 촬영했기에 저런 색감이 나오느냐”고 문의해올 정도라고 한다. 물론 HD기술력은 일본이 훨씬 발달했지만 실전 데이터로 보자면 한국와 별 차이없다는 것이다. “좋은 물건을 써봐야지 나쁜 게 뭔지 알게 되듯이, 시청자들 역시 좋은 화면을 봐야 무엇이 조잡한 화면인지를 알게 된다. 조명설치에 시간이 많이 들어가고 촬영도 까다롭긴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드라마 화면의 상향표준화를 부추기게 될 것”이라며 촬영감독 박화진과 조명감독 박창우는 입을 모아 <>이 “명품드라마”임을 강조한다.

또한 단막극에서는 자주 시도되었지만 <>은 16:9의 비율로 온전히 방영되는 국내 최초의 미니시리즈다. 보통 DVD를 가정에서 볼 때 상하가 잘려서 보이는 레터박스는 방송사로서는 비경제적인 선택으로 인식되어왔다. “들리는 말로 일본 한 방송사에서 조사를 했는데 레터박스로 처리할 경우 시청률이 1, 2% 정도 떨어진다고 하더라.” 사실 지금 시청률이 0.1%도 아까운 MBC쪽을 설득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학적인 욕심으로 감행한 무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유독 궁중용어나 외계어, e-용어들에 대한 주석이 잦은 이 드라마에서, 화면을 가리지 않으며 자막을 소화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해낸다.

우석황제 대략난감 떡잎구라 속여주셈

철석같이 믿었던 사실이 한순간에 새빨간 거짓말로 둔갑하는 희대의 사기사건을 겪은 대한민국. 그 대중을 흔들기 위해선 어쩌면 더 큰 거짓말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UFO처럼 날아와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 국가라고 말하며 그 역사를 줄줄 읊는 뜬금없는 드라마 <>. 그들이 거대한 스케일과 교묘한 속임수로 시청자들의 뇌 속을 빼먹는 사악한 우주군단인지, 아니면 발칙한 상상력과 꼼꼼한 만듦새로 한국 드라마 시장을 건강하게 긴장시키는 구세주인지는 아직 두달은 더 지켜볼 일이다. 좌우당간 거짓말의 미학은 얼마나 사실적이냐에 있다. 이왕 속고 사는 세상, 우리는 좀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원한다. 끝까지 제대로 속여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거짓말 그까짓꺼, 형이, 이 형이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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