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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직업의 세계
김혜리 2006-02-10

영화전문지 <시네아스트> 2005년 겨울호가 ‘세계 영화비평의 현재’라는 제목의 지상(紙上) 심포지움을 열었다. 20개국 22명의 현직 영화평론가들에게 설문을 돌려 답변을 받았는데 글쟁이 아니랄까봐 모든 대답을 아우르는 한편의 에세이를 제출한 평론가들도 있었다. <시네아스트>는 2000년에 미국 평단을 대상으로 비슷한 특집을 게재한 적이 있으므로, 이번에 확장판 속편을 내놓은 셈이다. <시네아스트>의 질문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왜 비평을 하는가? 훌륭한 평론의 요소는? 영화산업의 세계화를 어떻게 바라보나? 평론가로서 당신의 모델은? “현대영화의 숙명과 평론의 책무”에 관한 각국 비평가들의 성찰은 과연 깊었다. 군데군데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법 긴 기사를 단숨에 읽게 만든 유혹은, 본론과 무관한 문장에 비친 직업적 애환(?)이었다.

일단 그들은 비인기 종목 선수의 설움에 친숙하다. 브라질 평론가 페드로 부처는 ‘난 이다음에 커서 영화평론가가 될래요!’라고 외치는 애를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론가란 감독이 되려다 실패한 사람이나, 게으른 저널리스트라고 보는데 자신은 한번도 글쓰기보다 영화 만들기에 더 끌린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엉거주춤한 직종이라는 눈총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한편 아르헨티나 평론가 퀸틴은 “평론은 영화를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불러일으키는 짜증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새침하게 정리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 장 미셸 프로동 편집장은 이견을 넘어 아예 영화에 대한 집착 자체를 이해 못하는 동료, 친구, 배우자에 대해서는 “말을 섞지 말고, 절교하고, 이혼하면 된다”는 비장한 농담을 던진다.

만약 평론가가 불요불급한 직업으로 취급된다면, 한 평론가가 있기까지 주변의 관용과 후원이 필요할 터다.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평론가가 됐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독일의 올라프 묄러는 기말고사 중 베를린영화제에 보내준 은사와 25살까지 놀고 먹으며 스타일을 찾도록 도와준 부모님께 감사한다. 각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가 초래하는 어려움도 있다. 과거 경직된 미학적 규범의 지배를 받아온 러시아 평론가는 “비평이 ‘불온한’ 예술가를 징벌하는 기계의 부품 노릇을 한” 경험을 지금도 곱씹는다. 한편 <방콕 포스트>의 평론가 콩 리트디는 “타이인들은 전통적으로 비평을 무례함과 혼동한다. 작품의 질을 평하면 영화감독을 인간적으로 모욕한 것으로 여긴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심금을 울리기로는, ‘당신이 느끼는 가장 큰 압박’을 묻는 질문에 “내 자신의 미력함”을 말한 장 미셸 프루동의 대답이 제일이다.

잡지를 덮고 나니 평론가의 가계부라도 엿본 기분이다. 영국 비평가 조너선 롬니는 평론집 <즉석 주문>에서 자신의 일을 쏟아지는 주문에 맞춰 음식을 내는 대중음식점 주방장에 비한 적이 있다. 이후 내 머릿속에서 평론가의 이미지는 정신없이 접시를 차려내는 조리사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만국의 평론가여. (단결 따위는 하지 마시고) 자괴감으로 힘겨운 새벽이면, 전세계 어딘가의 ‘주방’에서 까다로운 재료, 뜨거운 아궁이와 싸우고 있을 동지들을 떠올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