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기씨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 ‘학권’이라는 것이 나온다. 학의 권법. 주인공 최배달의 상대인 중국계 노인이 쓰는 권법은 학처럼 부드럽다. 상대를 치는 것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식의 기존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헤비급의 핵펀치라든가 웰터급의 전광석화 같은 연타 따위는 그에게선 나오지 않는다. 초절정 고수이면서도 공격력은 지극히 미약하기만 하다. 그 대신 학은 매우 부드러워 상대의 어떤 비호 같은 공격도 그를 따라잡지 못한다. 눈부신 가속도를 자랑하는 어떤 필살기도 그를 맞추지 못한다. 마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이 일으키는 바람의 진동을 따라 저절로 상하좌우로 밀려나듯이…. 그렇게 바람 속의 학처럼, 물 속의 학처럼 유유하다. 백전불태(百戰不殆), 손자가 ‘백번 싸워도 언제나 위태롭지 않다’고 말한 그 경지가 바로 이러하리라. 누구를 이기지는 못해도 누구라도 그를 이길 수 없는 경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1년9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2001년 개혁·개방 뒤 상하이에 처음으로 갔을 때 그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상에 놀라고 말았다. 상하이 와이탄 지역에서 바라다보는 황푸강 건너편의 푸둥 지역은 마치 공상과학영화 속의 미래도시처럼 스카이라인이 엄청나게 뒤바뀌고 있었다. 상하이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동쪽 심장으로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일까? 그 뒤 김 위원장은 실험적 개방에 나서 북쪽의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하고, 남쪽의 개성에 합작공단을 세우는 데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한편으로 부시의 미국과 맞닥뜨리면서 다시 경직 기조로 돌아서버린다. 그들을 따라다니는 ‘벼랑 끝 전술’이라는 표현처럼 강경 일변도의 정책 기조를 늦추지 않았다. 6자회담도 북한의 이런 기류에 그대로 휘말렸다.
미국과의 사이에 위조 지폐 문제까지 뒤엉켜버린 상황에서 북한의 이런 강경책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강공책 등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너무 많이 쥐어준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슈퍼 노트’라고 불리는 100달러짜리 위조 지폐 문제는 상황에 따라선 세계 최강의 군사국가 미국이 언제든 ‘전쟁’까지 벌일 수 있는 구실로 전화될 수 있다. 지폐 위조는 국제적으로 교전의 명분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어쩌면 북한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방면에서 강경한 대미 저항 전선을 구축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의도에 밀리거나 휘말리지 않겠다고 늘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마치 공부는 제법 잘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을 버티고 끝까지 살아남아 졸업만은 하려는 것처럼…. 그런데 미국은? 전혀,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북한은 독립변수라기보다 종속변수다. 대중국 전략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이리도 해볼 수 있고 저리도 해볼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적어도 남포항이나 원산항에 미군 핵함정의 기항을 허용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이 북한에서 제시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아마도 미국의 강경파들 사이에서는 이런 두 가지 기류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일단 시기 문제는 별도로 치자).
“중국을 경제적으로 공격하는 게 낫다.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을 벌이자. 위안화는 폭락하고 중국의 고도성장은 종지부를 찍을 것은 물론 중국 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허약해진 중국은 요리하기 쉽지 않은가?”
“그런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중국을 군사적으로 굴복시켜야 한다. 경제적 우회공격론 따위에 빠지다간 공연히 중국 인민들과 중화권 세력들만 결집시키는 등 갖가지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다. 게다가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은 동아시아권의 통화와 경제를 교란시켜 우리 우방인 일본마저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런 조짐이 사실이라면 북한으로선 대응 방식이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 외형적으로는 중국과 동맹을 이루고 있지만, 상대는 중국에 대한 경제 전쟁을 위해 북을 향해 군사적 공격을 해올지도 모르는 판이라니! 여기서 상정할 수 있는 것이 북한의 부드러운 권법이 아닐까? 개혁·개방, 이 길을 통해 북한은 군사적 공격의 최전방 대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 길을 통해 남쪽과 경제적으로 이어지고 섞이면서 또 다른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비록 다른 부작용이 많이 따른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김정일 위원장의 귀국 뒤 어떤 권법이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