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야망·모래성·눈꽃 과거작품들 줄줄이 안방으로 손쉽게 시청률 노린다는 비난…신인 작가 개회 봉쇄 우려도
다시 김수현(63)이다. 한국 방송 드라마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작품들로,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을 이어온 작가로 꼽힐 만한 이다. 1968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문화방송 공모에 뽑힌 지 어언 40년을 바라본다. 거의 매년 일일극이나 주말극 등 연속극을 한편씩 써왔으니 어림잡아 40여편에, 특집극까지 포함하면 두배를 넘어선다. 다른 스타급 작가들이 그에 대한 존경과 함께 극복을 외치는 것은, 힘 있는 특유의 이야기와 정확하면서도 현실적인 캐릭터, 폐부를 날카롭게 쑤셔대는 대사들의 힘이라 할 터다.
그래서 아직도, 여전히 김수현일까? 그가 원조 스타 작가로 여느 신인들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방송계 뒤안길에는 그러나, 방송 드라마 퇴행의 혐의도 없지 않다. 한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드라마의 주가가 치솟는 이때, 김수현 드라마의 리메이크작과 소설의 드라마화가 잇따라 준비된다. 발 맞춰 지상파 3사가 피 튀기는 김수현 모시기 경쟁에 나선다. 노작가가 자신의 옛 작품을 되살려 더욱 높은 완성도를 갖춰 개작하려는 욕심을 갖는 건 논외로 쳐도, 원작의 명성에 기대어 쉽게 흥행몰이에 나서려는 방송사의 행태는 여러 모로 ‘제 살 깎아먹기’라는 지적이 많다.
다시 뜨는 김수현=김수현 리메이크가 붐이라도 일으킬 모양이다. 조기 종영 20여년 만인 99년 리메이크된 <청춘의 덫>이 문을 열었다면, 4일 시작한 <사랑과 야망>은 리메이크의 본격화를 알렸다. 87년 문화방송에서 방영됐던 흥행작 <사랑과 야망>이 20여년 만에 에스비에스서 다시 새 빛을 보고 있다. 88년작 <모래성> 또한 2003년 리메이크 결정이 취소된 뒤 내년 방영을 목표로 다시 추진된다. 또 90년에 낸 소설 <눈꽃>도 올해 드라마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이에 더해 김수현 작가는 오랜 콤비인 곽영범 피디와 함께 지난해 각자의 이름을 따 드라마제작사 ‘프로덕션 수&영’을 만들어 직접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드라마 다시 만들기가 꾸준히 이뤄지는 것은 무엇보다 김수현 드라마가 흥행을 보장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리메이크되는 원작들은 공통적으로 방영 당시 사회적 물의를 빚는 등 숱한 화제를 낳으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뒤집어 보면 당대의 시청자들이 어떤 부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지를 미리 짚는 데는 최고라는 얘기도 된다. 78년 <청춘의 덫>은 ‘미혼여성의 불륜’과 ‘혼전 임신’ 등을 이유로 20회에 종영됐다. <사랑과 야망>은 현재 드라마 공식처럼 돼버린 ‘재벌 2세’와 ‘출생의 비밀’을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도입했으며, <모래성> 또한 ‘남편의 불륜’과 ‘아내의 불치병’이라는 고전적인 멜로 드라마의 틀을 완성했다.
문제는 리메이크작이 과연 오늘날에도 이 구실을 해낼 수 있느냐인데, <청춘의 덫>은 성공적이었다. 심은하는 이 드라마를 통해 스타 자리를 굳혔으며 가구시청률은 40%를 넘어섰다. <사랑과 야망>도 2회까지 평균 가구시청률 14.1%(티엔에스 미디어코리아)로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50대 여성(15.2%)과 40대 여성(13.2%) 등 원작 드라마를 봤던 이들에 시청층이 몰려 있는 것은 한계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의 퇴행인가=방송사들은 김수현 드라마의 흥행에 거의 의심을 품지 않는다. 전작들의 화려한 승률이 뒷받침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한번 성공한 작품을 새 감각에 맞춰 다시 만든다는 데에 시청률은 따논 당상이라고 여긴다.
표절 소송 등으로 그동안 김수현 작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문화방송이 김수현 원작의 <눈꽃>을 올 하반기 방영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만큼 사정이 절박했던 탓이다. <부모님 전 상서> 방영 전 “왜 문화방송 드라마는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냥 엠비시가 싫어”라며 거부감을 표현했던 김 작가를, 극심한 드라마 시청률 부진에 헤매는 문화방송이 발벗고 나서 붙잡았다. 문화방송 고위관계자는 “김 작가의 드라마를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올 하반기부터 김수현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 시청률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비에스는 <사랑과 야망> 리메이크 작에 이어, <모래성>을 잡으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부모님 전 상서>를 방영하려고 정연주 사장이 직접 나선 것으로 알려진 한국방송 또한 이 경쟁에서 빠져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몰려가는 것은 방송 드라마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퇴행적 현상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 방송 관계자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지 않고 과거 성공한 작품의 리메이크로 쉽게 시청률 경쟁에 나서는 방송사가 문제”라며 “과거 작품의 리메이크가 나오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만 매달리면 신인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이 나올 가능성 자체가 원천 봉쇄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스타급 작가들이 과점하는 방송 드라마의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아지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드라마의 소재가 고갈되자 과거로 눈을 돌린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 중견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가 방송사의 재정적 여건을 크게 좌우하게 되고 그만큼 드라마 편수가 늘어남에 따라 드라마가 뻔한 이야기들의 반복이 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신인 작가들의 등용문인 단막극을 활성화해 새 피를 수혈하는 데 집중해야 미래가 있음에도, 방송사들은 과거 성공작에 대한 리메이크라는 쉬운 길을 택해 자멸을 재촉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어 “대가의 작품이 활발하게 리메이크 되는 것과 동시에 톡톡 튀는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신인 작가들이 충분히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