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제까지 만든 모든 기계 중에서 나는 비행기가 제일 좋다. 아직도 초경량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갖고 있지만, 땅 위에서 먹고사느라 바빠 아직 하늘 위에 뜬 꿈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비행기 중에서도 제트기는 별로다. 비행기는 역시 프로펠러기가 최고다. 컴퓨터로 작동되는 제트기는 왠지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에는 하루에 10원씩 받는 용돈을 모아 플라스틱으로 된 비행기 모델을 사곤 했다. 포커 삼엽기, 메서슈미트, 스피드파이어, 제로센 등등. 대부분 1, 2차대전에 사용된 전투기들이다. 내 마음에 드는 비행기들은 왜 하필 죄다 전투기였을까? 아직도 나는 커다란 여객기나 뚱뚱한 수송기보다는 날렵한 전투기의 몸매가 훨씬 더 섹시하다고 느낀다.
비행기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붉은 돼지>에 나오는 장면이 생각난다. 포르코가 탄 비행기가 구름바다 위로 떠오른다. 잠시 뒤 그 옆으로 여러 나라의 국기를 단 수백대의 전투기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포르코와 나란히 비행을 하다가 이들은 그를 놔두고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전투에서 격추당한 비행사들은 그렇게 승천을 했을까?
<청연>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의 일본인들은 박경원의 손에 억지로(?) 일장기를 들려준다. 영화 밖의 사회는 이 행각을 문제 삼는다. 전투기의 꼬리에 붙은 국기만 없으면 모든 비행사는 한 형제겠지만, 비행기가 영원히 하늘에 머물 수는 없는 일. 비행기가 내려앉을 땅은 국가와 민족으로 나뉘어, 국적을 초월하는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조선으로 진주하는 일본군의 행렬에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난감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제 나라를 침략한 군대를 보고 ‘닌자’를 떠올리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이 영화 전체의 상징일 게다. 그저 하늘을 날고 싶어 대일본제국을 위해 비행을 한 박경원의 태도 역시 철없는 조선 아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돼 있다. 이 때문일까? 영화관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영화에 문외한이라지만, 이렇게 흥행에 참패를 할 정도로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기사를 떠올렸다. 이 영화가 박경원의 친일 행각을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보고 친일을 미화하려 했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
비뚤어진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단죄가 정의로우려면, 그것의 칼날은 더 정교해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공동체의 기억을 바로 세우는 작업은 어차피 선이 굵게 갈 수밖에 없지만, 문화는 그보다 더 섬세한 터치가 필요하다.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서 비평적 판단을 내릴 때에는 좀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친일의 감성이 진하게 묻어나는 예술들이 있다. 수많은 문인들이 친일시를 썼고, 수많은 화가들이 친일화를 그렸다. 해방 뒤에도 이들은 살아남았고, 그들의 부끄러운 행적을 변호하는 논리 역시 여전히 살아 있다. 하지만 보기에 <청연>이 던지는 메시지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은폐하고 미화하기 위한 수구세력의 변명과는 많이 다르다.
<청연>은 선전영화도 기록영화도 아니고, 감독의 주관적 해석으로 빚어낸 극영화일 뿐이다. 조선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는 왜 손에 일장기를 들었을까? 그저 날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개인적 출세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반민족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이 세 가지 가능성 중 어느 쪽으로든 상상력을 펼칠 자유가 허용돼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