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야만적 살인인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와서 국가가 잘못을 시인한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유족들의 고통도, 관련자들의 잃어버린 시간도 되돌려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가란 참 무책임하다. 인혁당 사건 같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라면, 개인의 재산이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도 다반사다. 물론 요즘의 사립학교법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대체로 국가는 지배계급에 포함되는 사람들의 재산과 이익은 철저하게 보호해준다.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다행히도 인혁당 사건은 명명백백한 인권침해이자 살육이었기에 인정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인정된 범죄보다 인정되지 않은 만행들이 더욱 많다. 그런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을 수도 없고, 사과를 받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호소하고, 청원하고 해야 할까? 가끔은 이 세상에, 정당한 폭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유괴는 말고, 이를테면 국가에 대한 폭력적인 저항 같은 것. 전경을 때리는 게 아니라, 국가에 정면으로 맞서는 어떤 방법 같은 것들. 가키네 료스케의 소설 <와일드 소울>에서 에토와 그의 친구들이 감행하는 복수 같은 것들.
6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대규모 남미 이민이 추진되었다. 일할 의지만 있다면 거대한 농토를 공짜로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엉터리로 진행된 이주 계획은 사기였다. 외무부 직원은 승진하기 위해서, 알선 업체는 돈을 벌기 위해서, 순진한 농민들을 아무것도 없는 정글 속으로 밀어넣었다. 개간도 되지 않은 땅에서, 태반이 풍토병으로 죽어가는 광경을 목도한 에토는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복수를 감행한다. 결코 반성하지 않는 국가를 대상으로, 호소가 아닌 폭력을 택한 것이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그건 진실이지만, 때로는 필요하다. 모든 폭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폭력이 무엇인지를 가릴 줄 아는 눈이 더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에는 유난히 ‘사회’에 복수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많다. 공해병을 일으킨 기업을 대상으로 피해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복수하는 <대유괴> 같은 영화도, 감상적이지만 뭉클하다. 개인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범죄가 아닌 ‘공적인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운 국가나 기업의 만행에 복수하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고, 슬프다. 결코 돌이킬 수 없고, 복수한다 해도 여전히 국가는 허락된 범죄를 저지를 것이니까. 유일한 도피처는,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케이에게는 돌아갈 브라질이 있었기에, <와일드 소울>은 완벽한 하드보일드가 될 수 없었다. 국가에 대한 복수는 결코 낭만적인 도취가 아니다. 그건 최후의 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