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우이도에서 촬영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목포에서 배로 3시간을 가야 한다는 우이도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출발 하루 전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다. “날씨 문제로 우이도 촬영은 취소되었습니다. 대신 전남 장흥 촬영이 가능한지 알아보려고 제작부가 내려가 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의 발자국을 되짚는 남자와 그가 길에서 만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는 김대승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가을로>의 촬영 일정을 결정하는 것은 감독도 제작사도 아닌, 폭설과 이상한파로 변덕을 부리는 독한 날씨였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전남 장성의 충령산 자연휴양림 행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촬영팀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으로 향했지만, 공들여 감은 스노체인이 눈과 빙판으로 무장한 비포장 오르막길에서 줄줄이 ‘터져버렸다’. 염화칼슘과 스노체인을 다시 구해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 보다 모텔 방을 하루 더 알아보는 게 빠르겠다는 수군거림이 체념으로 바뀔 무렵에서야 산은 길을 내주었다. 김대승 감독은 산 중턱에서 멎어버린 차를 두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갔다고 했다.
김대승 감독은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로 촘촘하게 감정의 타래를 엮은 탄탄한 멜로를 선보였다. 고어에 가까운 참형 장면이 연달아 등장하는 역사추리물 <혈의 누>는 뜻밖의 선택으로 보였지만, 반복되는 플래시백이 드러내는 사건의 열쇠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였다. <가을로>가 그의 멜로 복귀작이라고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멜로영화를 세 편째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혈의 누>에서는 억압적인 시대상이, <가을로>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운명적 사랑을 기어이 지키게 만드는 장애요소로 등장하는 그의 멜로영화는 불치병이라는 상투적인 멜로 장치를 극구 피한다. <가을로>는 사랑의 정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법고시를 통과한 뒤 바쁜 나날을 보내던 현우(유지태)는 오랜 연인이었던 민주(김지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현우는 급한 일 때문에 민주를 먼저 백화점으로 보내고 뒤따르는데, 눈앞에서 백화점이 붕괴되는 모습을 목격한다.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검사로 일하는 현우는 담당 사건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 짧은 휴직을 강요받는다. 그때 민주의 아버지가 그에게 노트를 한권 건넨다. 10년 전 민주가 현우와의 신혼여행을 위해 준비한 여행 코스가 정성스레 적혀 있는. 현우는 민주가 밟은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는데, 가는 곳마다 한 여자와 자꾸 마주친다.
10년 전에 떠난 그녀의 흔적 끝자락에서
민주와 현우가 만나는 장면을 찍는 이날 촬영분은 <가을로>의 매력과 김대승 감독의 장기를 고루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현우를 본 민주의 환한 미소가 아스라이 부서지며 안타깝고 물기어린 표정으로 가라앉는다. 환상인지 회상인지는 모호하다. 환상(혹은 회상)의 주체 역시 명확하지 않다. 10년 전 이곳을 민주가 찾았던 일은 분명하고, 현우가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같은 길을 걷는 것도 확실하지만, 이 장면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둘이 한 공간에서 마주함으로써 강한 정서적 감흥을 표출한다. “시간 순서를 뒤섞으면서 극적 긴장감을 주는 게 즐겁다. 감정에 도움이 된다면 리얼리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를 뒤섞고, 과거의 사건을 일부 숨김으로써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가을로>에서 그는 좀더 대담해지고 정교해졌다. “영화는 시간을 컨트롤하는 일이다. 내가 새로 만들어낸 시간이 감정에 봉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빛이 점점 기우는 게 안타까워 점심시간을 3시간이나 늦추고 촬영을 계속하는 사이사이, 제작부는 맨땅이 보이는 곳으로 눈을 퍼다 날랐다. 눈발이 휘날리는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강설기와 강풍기가 매섭게 돌아갔다.
김대승 감독은 <가을로>에 이르러 빈자리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애잔하게 들여다본다. 그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랑을 잃고도 ‘살아지는’ 사람의 마음을 그는 따뜻하게 다독인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강요하는 대신 ‘부재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남긴 상처를 며칠간의 여행으로 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염치없는 일일뿐더러 살아남은 사람들의 괴로움에도 누가 되는 일이라는 게 김대승 감독의 생각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해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따뜻함을 주고 싶다. 다 나았다는 게 아니라 ‘힘들지만 살 수 있을 거야’라는 격려와 다독거림이다. 허황된 꿈도 아니고 막막함도 아니다. 답답한 현실에 바람구멍을 뚫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마주한, 먼저 떠난 연인의 흔적 끝자락에서 삶을,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사랑의 단초를 찾는 <가을로>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잃은 사람도 미소어린 눈물을 훔칠 수 있는 다정한 멜로영화가 될 것이다. 올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래서, 흐드러진 단풍만이 아니다.
김대승 감독 인터뷰
“사랑에 빠지는 타당한 이유를 관객이 느끼게 해야 한다”
-테스트 촬영도 여러 번 하고, 실제 촬영도 여러 컷 가더라. 섬세한 감정을 잡기 위해 유독 까다롭게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연기로 치자면 셋 다 선수들인데, 뭘. 촬영을 하고 “지수씨, 좋았어요?”라고 물으면 본인이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고, 그 느낌을 살려 다시 가는 식일 뿐이다. 데뷔작을 찍을 때는 모든 움직임을 코치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고개를 몇 도 돌리고, 어떤 호흡에서 대사를 하라는 식으로.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배우들도 미묘한 감정을 잘 끄집어내준다.
-전국 절경을 찾는 로케이션에 대해 임권택 감독 덕분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임권택 감독님과 장소 헌팅을 갔을 때, 감독님이 “차 세워봐. 너 소쇄원 가봤어?”라고 물으셨다. 안 가봤다고 했더니 빨리 갔다오라고 하셨다. 이번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다산초당도 그렇게 알게 된 곳이다. 당장 영화에 담을 곳이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좋은 장소들을 알려주셨다. <창>을 찍을 때였던가, 7번 국도에 반해서 영화를 마치고 7번 국도를 따라가는 도보 여행을 한 일도 있다.
-정통 멜로라는 점에서 데뷔작인 <번지점프를 하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가을로>를 찍으면서 멜로적인 어떤 점을 보강하거나 강조할 생각인가. =자신이 태희라는 사실을 현빈이 깨닫는 장면을 너무 갑작스럽게 처리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지켜야 할 디테일이 있고 인과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의 부족이건 생각의 부족이건 다시 생각해보면 안타깝다. 쓸데없이 까분 장면들도 있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시종 정적인데, 산꼭대기에서 인우와 태희가 절벽 아래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지미집을 이용해서 현란하게 카메라 움직임을 잡았었다.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결국 두 배우의 얼굴 감정도 못 담고, 그 절벽의 아득한 아찔함이라는 정보도 못 살린 대목이어서 후회가 되더라. 인우 반 학생이 담배를 훔치는 장면의 롱테이크도 전체 이야기와 관계없는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정직하게 아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한다. 멜로는 공식이 뻔하기 때문에 디테일이 중요하다. 사랑에 빠지는 타당한 이유를 관객이 느끼게 해야 한다. 멜로는 벽돌 하나만 잘못 쌓아도 무너지는 집이다. 한 장면을 실수하고 나서 더 임팩트가 큰 장면을 넣어 만회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장에서 한 장면씩 찍을 때보다 극장에서 완성된 영화를 볼 때가 좋다. 내가 만드는 영화라면 적어도 내 마음은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야외촬영이 많고 해가 짧아 시간에 쫒기는데도 콘티없이 진행한다. =나는 현장이 내게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날 찍을 장면에 대한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점들만 가지고 현장으로 나가서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