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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3인의 신작 현장 [2] -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
김현정 2006-02-03

마른 나뭇잎이 쌓인 남산 동물원 앞에 현우(지진희)가 서 있다. 그늘이 생길 정도로 움푹 팬 얼굴이지만 아직 젊은 그는 몇달 뒤면 감옥에 들어갈 것이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인 나이가 되어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죄없는 청년, 증발해버린 젊음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죽은 연인. 황석영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오래된 정원>은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시대를 응시하는 영화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죄가 되고 찰나의 행복도 수치였던 80년대를 바라보며,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들려주고,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도 생명을 찾아낸다.

<오래된 정원>은 우연하게도 임상수 감독의 전작 <그때 그사람들> 1년 뒤에 시작되는 이야기다. 박정희가 죽고 서울은 봄을 맞았다 했지만, 그해 봄은 매우 짧았다.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기 직전에 도망 나온 현우는 반년 넘게 떠돌다가 전라도 갈뫼에 사는 미술교사 윤희(염정아)를 찾아간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는 광주를 기록한 비디오를 보고선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해 현우를 숨겨주기로 마음먹었다. 초봄 무렵에 만난 현우와 윤희는 두 계절을 함께 보내며 텃밭을 일구고 작은 집을 단장한다. 그러나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현우는 갈뫼를 떠나고, 18년 동안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직계가족이 아니어서 단 한번도 윤희를 만날 수 없었던 현우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잠깐 동안 행복했던 갈뫼 옛집을 찾아간다.

1962년생이므로 현우가 도피 중이던 시절 대학생이었을 임상수 감독은 그 무렵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에 다닐 때 가장 부르주아 서클이라고 불렸던 사진반에 있었다. 그러니까 시위 장면을 찍거나 하는 위험한 일은 안 했고.(웃음)” 그런 임상수 감독에게 <오래된 정원>은 작가의 이름과 줄거리만으로 흔히 짐작하듯 ‘80년대 운동권의 러브스토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황석영이 친운동권 성향을 지닌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은 친운동권이냐 반운동권이냐,라는 기준으로 나눌 수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운명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을 했던 이들의 어리석음과 타락까지도 그리고 있다.” 어쩌면 <오래된 정원> 촬영현장을 찾았던 날 찍었던 장면이 그처럼 냉정한 태도의 단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80년대 두 남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

남산 동물원 앞에서 현우와 그 친구의 접선 장면을 찍고 난 <오래된 정원> 제작진은 바로 근처 산책로와 약현성당에서 윤희와 후배 영작(윤희석)의 만남으로 옮아갔다. 임상수 감독이 “비리비리한 게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이름도 영태에서 영작으로 고치고 성격도 바꾼 이 젊은이는 구속을 각오한 선발대로 나서게 된다. 한발 떨어져, 그러나 현우를 빼앗긴 탓에 다시 반발쯤 들어가 그들을 지켜보는 윤희는 몇년 살다가 나오면 된다고 무심하게 손을 흔들어줄 수가 없다. “니들 인민재판하니? 니들이 무슨 가미카제야?” 추운 날씨에 가을옷만 걸쳐 하얗게 얼어붙은 염정아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소설 속의 윤희와 달리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인다. 영화가 처음인 윤희석은 나무줄기 사이로 얼굴이 스치는 타이밍까지 계산하는 감독의 요구를 몇번 놓치면서 염정아의 목소리는 찬바람을 맞아 점점 싸늘하게 얼어갔다.

임상수 감독은 윤희가 영작을 붙든다고 해서 그녀의 성격이 변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윤희는 미경이 분신자살하거나 영태(영화의 영작)가 북한으로 가는 건 그들의 인생이라고 여겨 지켜본다. 하지만 그녀가 그들의 선택을 좋아했을까? 윤희는 정치적인 태도와 다르게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윤희는, 영화에선 편지에 짧게 언급될 뿐이지만,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나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마침내 익숙지 않았던 모성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가 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오래된 정원>은 현우가 출소하는 순간에서 시작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그 때문에 연인이 결코 함께하지 못하는 이 기묘한 러브스토리는 애잔하고 안타깝다. 이미 사라진 무언가를 추억하는 여정. 코가 오똑한 하얀 고무신과 비를 맞고 있던 종아리를 윤희의 마지막 모습으로 간직한 채, 현우는 자신이 갇혀 있는 사이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던 윤희의 시간을 더듬는다. 그 안에는 “나만은 그 사람에게 의리를 지켜주고 싶어” 고집스럽게 혼자 살았던 윤희의 삶과 그 어머니를 이해하진 못했으나 무척 좋아했던 딸아이 은결이가 있다. 감옥에서, 빈방에서 꿈처럼 그려보았던 행복. 그러나 <오래된 정원>은 부서진 삶을 한탄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오래된 정원>의 힘은 윤희가 남긴 이 문장 안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임상수 감독 인터뷰

“<그때 그사람들>이 저쪽의 이야기라면, <오래된 정원>은 그 시대 이쪽의 이야기다”

-<오래된 정원>은 2000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몇년 전에 읽었을 텐데, 그때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오래된 정원>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80년대 러브스토리가 재미있을지 의문은 존재한다. <그때 그사람들>을 하고 나서 자신이 생겼다. 나는 대중이 <그때 그사람들>을 재미있어했다고 생각했고, <오래된 정원>을 영화로 만들어도 좋은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우연이기는 했지만 <오래된 정원>은 <그때 그사람들>과 상당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0·26 이후 80년 광주항쟁이 있었고, 운동권의 격렬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동일한 세력이 그 움직임을 폭압적으로 내리눌렀고. <그때 그사람들>이 저쪽의 이야기였다면 <오래된 정원>은 비슷한 시대 이쪽의 이야기인 셈이다.

-원작은 8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변화를 상세하게 서술하지만 그런 부분을 영화에서 살리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어떻게 각색했는가. =소설은 묘사와 설명을 같이 사용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는 묘사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의 설명이 주는 느낌을 시나리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80년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을 뒷배경에서 슬쩍 살려준다고 할까. 영화는 현우와 윤희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고, 정치적인 이야기는 재미없으니까 (웃음) 많이 생략한 편이다.

-윤희와 현우는 몇달을 함께 살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외엔 사건이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 편인데. =음… 그러니까 <오래된 정원>이 흥행이 되지 않을 거란 예측인가? (웃음) 나는 그게 이 작품의 묘미가 될 거라고 믿는다. <그때 그사람들>은 흥분되고 희열이 있었는 데 반해 <오래된 정원>은 담담하게 찍어가고 있다. 하지만 결국엔 심금을 울리는 폭풍 같은 감정을 만들어야 하는 영화다. 윤희와 현우는 오래 떨어져 있어 서로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찬스가 없다. 그래서 윤희가 어머니에게 그 사람에 대한 의리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들어갔다. 아직 시나리오에 쓰지는 않았지만, 현우도 친하게 지내던 교도관에게 윤희 이야기를 한다. 현우라고 해서 24시간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진 않을 테니까.

-지진희와 염정아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캐스팅은 아니었다.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가. =지진희는 드라마에 주로 출연했고 영화는 거의 안 했다. 그러므로 <오래된 정원>은 그가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있는 얼굴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연기도 좋게 봤다. 염정아는 욕심이 상당히 많은 배우다. 현대적이고 도시적이고 날카로운 느낌인데, 그 느낌을 어떻게 윤희와 매치시킬지,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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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