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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있수다] 나를 두번 죽인 <폴링 다운>
김나형 2006-02-01

그것이 아마 99년 여름, 아니 98년 겨울이던가? 어쨌든.

여름방학인지 겨울방학인지를 맞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는 동안, 나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창동 학문당 서점 뒷길 칙칙한 지하 비디오방에서 <폴링 다운>을 ‘관람’했다. 남녀 커플도 아닌 우리가 대학교 1학년 혹은 2학년의 방학에, 비디오방에서 그런 괴상한 영화를 보아야 할 이유란, 아마 우리가 그때 수능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노미-카오스-공황-대(大)패닉 상태였기 때문이었다는 것 정도뿐이었겠지만, 아주 아주 가끔씩 만나기 때문에 늘 보고픈 그 친구와, 나는 그날 어찌된 일인지 창동 학문당 뒷길에 있는 비디오방에서 <폴링 다운>을 보고 말았다.

물론 후회했다. 그 영화는 내가 보자고 한 것이었고, 내가 보자고 한 그 영화는 우리를, 반박하고 싶으나 뭐라 반박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렇다고 아무 말 않으려니 수긍하는 것 같아 상당히 불쾌하고 찝찝한, 뭔가 그런 깜깜한 수렁으로 밀어넣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대충 5, 6년쯤 지난 지금. 명절 특집 기획에 <폴링 다운>에 관한 얘기를 써야 하게 된 나는, (기억나는 것이 줄거리쪽이 아니라, 마이클 더글라스 얼굴과 상당히 불유쾌한 뒷맛뿐인 관계로) 황금 같은 일요일 밤에 <폴링 다운>을 ‘재관람’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다들 시시해하겠지만, 하품을 하며 다시 본 문제의 <폴링 다운>은 전혀 충격적일 것도, 찝찝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에 담긴 것은, 미국인뿐 아니라 세상 누구나 다 아는 심리인데(괴팍한 세상에 살다보면 한번쯤 빡 도는 때가 있잖은가), 조엘 슈마허는 그걸 영화로 만들면서, 자기가 설득하고 싶은 데선 오버하고, 얼버무리고 싶은 데선 대충 뭉개놓은 뒤, 두명의 주인공을 이용해서 양쪽으로 (도망갈) 길을 터 놓았던 것뿐이었다. ‘98년인가 99년인가에는 내 뇌도 푸딩 같았구나. 저런 꼼수에 번민했다니’ 하는 생각에 잠시 좋아라하던 나는, 그 푸딩은 벌써 갔고 꾸덕꾸덕해진 혈관들만 잔뜩 들었다는 데 곧 생각이 미쳤고, 그리하여 또다시, 영화와는 별개로 아주 찝찝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젠장, 이 돼먹지 못한 영화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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