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다큐공동체 푸른영상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 인디다큐페스티벌 집행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이상은 모두 김동원 감독을 수식할 수 있는 직책이다. 두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 <다섯개의 시선> 중 <종로, 겨울>을 만든 그를 만나, 다양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많은 감투(?) 중 어느 것 하나 그저 이름만 걸어놓은 것이 없는 까닭에, 어떤 질문에도 그는 허투루 답하지 못한다. 그는 <송환>의 인기 때문에 끈끈한 지인들과 본의 아니게 멀어진 푸른영상이 한결같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부산국제영화제나 EBS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덕분에 입지가 좁아진 인디다큐페스티벌을 염려하며, 여전히 영진위 내부에 남아 있는 관료주의를 걱정한다. 글로 옮겨놓으니 마치 자신이 속해 있거나 책임지는 모든 조직의 고쳐야 할 지점만을 지적하는 엄격한 수장 같다. 그러나 그는 인연을 맺는 그 순간,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뜨거운 사람이다. 북한에서 있었던, 송환된 장기수 할아버지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애틋한 순간에도 김동원 감독을 떠나지 않던 미소는 진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터뷰 중간 중간, 민감한 사안을 논의하는 독립영화계 후배와 통화를 할 때도, 새로운 구성원을 받거나 거절하는 문제를 푸른영상의 다른 식구와 상의할 때도 마찬가지. 매번 예의 그 느릿한 말투로 후배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천상 사람이고 그들과 맺는 관계임을 알겠다. 차가운 겨울보다 냉혹했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조선족 동포 김원섭씨의 죽음은, 그가 마침 그때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그 비극이 남긴 개인적 앙금은 영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죄책감과 인간적인 미안함. 아마도 여지껏 김동원 감독이 만들었던 모든 작품의 시작은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지 20년. 첫마음을 결의하는 그 모습도, 왠지 20년 전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섯개의 시선>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봤나. =지난해 전주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다들 재밌었다. 내 작품이 제일 재미없던데.(웃음)

-<종로, 겨울>이 인권영화로서의 완성도는 가장 높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감독님은 그간 이런 분야의 작업을 계속해오셨고, 단순비교는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김동원이라는 이름이 다섯 감독 중에서 가장…. =생뚱맞다. (웃음) 인권위원회에서도 아마 첫 시도 때에 비해 감독 섭외가 더 힘들었을 거다. 물론 <여섯개의 시선> 때부터 인권영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을 소외시켰다고 독립영화쪽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참여한 감독들도 모두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영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최소한 80년대를 보낸 사람들이니까 일정한 감각은 있을 거고, 이런 기회를 통해 다시 커밍백하는 것 아니겠나. (웃음) 물론 충무로나 독립영화 감독이나 완성도에서는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독립영화쪽에서 더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데, 일단은 지명도가 중요할 테니. 인권위에서도 앞으로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참여 기회를 넓히겠다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조선족 동포를 다루겠다고 생각했나. =<상계동 올림픽> 뒷얘기, 봉천동 철거민의 이후, 김영식 선생에 대한 짤막한 인물다큐 등을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상계동 얘기는 짧은 시간에 준비하기가 어려웠고, 당시 <송환2>를 진행 중이어서 김영식 선생을 다루면 물타기가 되겠다 싶었다. 봉천동은 사무실에서 가까워 하고도 싶었는데, (웃음) 찾아갔더니 의외로 불만이 없더라. 일반적으로 임대아파트는 일반 아파트와 철조망으로 담이 쳐져 있는 등 말도 안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분들은 철거투쟁을 잘해서 그런지, 오히려 임대아파트 자리가 일반 아파트보다 좋아서 부러움을 산다더라. 그래서 결정한 게 김원섭 동포 얘기였다. 그 사건이 2003년 12월9일 대학로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당시 나는 서울독립영화제 <송환>의 상영 뒤풀이를 하느라 대학로에 있었는데 김원섭씨가 돌아가신 혜화동 파출소 근처에서 거기가 200∼300m밖에 안된다. 계속 께름직한 게 남아 있었다.

-장편으로 심도있게 다루고 싶지는 않았나.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단순히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근데 작업을 하다보니 이게 이주노동자 문제와도 다르고, 중국동포 문제는 남한뿐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큰 문제더라. 게다가 역사의식과도 연결되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이중성도 얘기해야 하고. 이거 잘못 시작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더이상 무를 수가 없으니, 뭐. 그런 것들은 결국 약간 언급만 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미 지나간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서 재연이 많다. 영화 속 겨울의 종로 거리 역시 김원섭씨의 눈을 통해 본 풍경 같고. =상황을 단정하지 않으면서, 김원섭씨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혼합하고 싶었다. 처음엔 다른 촬영기사의 도움을 받았다. 2003년 12월9일, 김원섭씨 돌아가신 지 딱 1년이 되던 날 밤 12시부터 찍었는데 그 화면이 너무 안정적이었다. 결국 일주일쯤 뒤 그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내가 다시 찍었다. 김원섭씨가 느꼈을 만한 추위와 불안감을 체험하기 위해 웃옷을 벗고 속옷만 입은 채 찍기도 하고.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건 도움을 청하는 김원섭씨의 전화를 시큰둥하게 받는 119와 112의 전화 목소리린데, 이것도 다른 분이 연기를 했다. 녹음된 실제 기록이 안 남아있었나. =119는 녹음기록을 넘겨받았는데, 112에서 끝까지 안 줬다. 이 작품이 현재 재판 계류 중인 상태라 변호사도 몇번이나 신청을 했는데 마찬가지였다. 인권위를 통한 협조공문도 소용없었다. 이게 원래는 당연히 줘야 하는 거다. 결국 변호사가 녹취록을 받았는데 불리한 내용, 구조를 청한 사람한데 “택시 타고 가라”고 하는 부분 등은 모두 빠져 있었다. 사건 직후에는 방송국에 녹음 테이프를 줬다기에, 그걸 토대로 한 녹취록을 참고하여 재연했다. 목소리 연기를 해주신 분 역시 조선족 동포인데, 그분도 얼마전에 잡혀가셨다더라.

-푸른영상 홈페이지 게시판에 얼마 전 조선족 선교센터에 다녀왔다고 쓴 글을 봤다. 뭔가 후속작업을 생각 중인가. =하고 싶은 건 있지만…. 작년에 영상원에서 다큐멘터리 워크숍 지도할 때 학생들이 조선족 문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거기서 미진했던 점은 조선족 사회가 어떻게 코리안드림 때문에 파괴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남한 사람들 때문에 파괴된 가정, 약해진 커뮤니티 등 그런 얘기를 해주길 바랐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작품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나야 뭐 기회가 닿으면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우선순위에서 비교적 뒤쪽에 있다.

-그럼 이번에는 그저 안부차 들렀다는 얘기인데, 평소에도 작업으로 알게 된 분들과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나. 한번 작업했던 대상과 이후의 관계 맺기가 어려운 문제일 것 같다. =그간 그렇게 여러 작품을 한 것도 아니다. 관계된 사람이 겹치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를 땐 거리낌없이 사람들을 만났고, 영화가 아니라 선전물이라 생각할 땐 부담이 없었는데 요즘은 점점 조심하게 된다.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여러 생각을 한다. 저분들하고 끝까지 같이 갈 자신이 있는지.

-작년 정동진 영화제 때 <송환>에 나오셨던 안학섭 선생님과 함께 휴가를 오셨는데. =그분은 집이 사무실 근처라서 평소에도 자주 만난다.(웃음)

-<송환> DVD가 얼마 전에 출시됐는데, 많이 늦어진 것 같다. =작년 12월31에 나왔는데 1년도 넘게 늦었다. 중간에 기계상의 사고도 있었고. DVD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 밑그림을 그릴 땐 감이 잘 안 오더니, 막상 하려고 드니까 욕심이 생기더라. 그래서 <송환>을 만드는 것보다 일이 더 커지더라.(웃음)

-시중 DVD 숍에선 찾아볼 수가 없던데. =푸른영상과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만 판매 중이다. 심의를 받지 않으려다보니 일반 숍에선 판매가 안된다.

-굉장히 긴 디렉터스 컷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방대했던 소스에 비하면 생각보다 부가영상이 적다. =영화 본편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절절한 사연을 갖고 계신 분들 모두 한 사람씩 미니다큐를 만들려고 했다. 근데 이게 시작하기도 힘들고 끝맺기는 더 힘들더라. 그래서 결국 본편에 안 나왔지만 가깝게 지냈던 분들 위주로 해서 13명으로 줄였다. 그 외 몇가지 부가영상이 더 있다. 하고 싶었던 것이야 많았지만 계속 DVD가 출시를 미뤄와서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었고, 욕심을 부려도 안될 것 같았다. 현재 <송환2>도 제작 중이니까 아쉽고 모자란 건 거기에 넣어도 되고.

-<송환2>는 <송환>을 만들 때부터 제작을 생각했던 건가. =그건 아니었다. 2001년 초였나, 2차 송환을 준비할 때는 이걸 또 찍어야 되나 생각하긴 했지만. <송환> 관련 관객과의 대화 때마다 2차 송환이나 평양에 간 선생들의 뒷이야기를 다룬 속편은 없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결심했다. 일단은 김영식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2차 송환 과정을 다룰 예정인데, 김영식 선생님은 나보다 <송환>의 조연출이었던 공은주 감독이랑 더 가깝고 해서 나는 직접 연출로 참여하진 않는다. <송환>처럼 주관적으로 접근할지 객관성을 유지할지는 논의 중이다. 여기에 평양 선생님들 생활도 찍을 수 있으면 좋겠고.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이미 첫 방북에 성공하지 않았나. =형식적으로는 아리랑 관광이었다. 북한에서 남한의 미전향 장기수들을 특별히 초청한 거다. 안학섭 선생도 같이 가셨고. 10월26일부터 4박5일 동안 다녀왔다.

-송환된 분들을 오랜만에 뵙고 정말 반가웠겠다. =그걸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갔는데, 다 부둥켜안고 우느라 찍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송환된 분들 전부는 아니고 열다섯분을 뵀다. 조창손 선생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못 나오셨고. 원래 편찮으시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그 친구분께선 많이 나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근데 왜 안 나오셨냐”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나.(웃음)

-유난히 반가웠던 분이 있었나. =김선명 선생님. 힘도 세신 분이 나를 콱 끌어안는데, 그 힘이 느껴졌다.(웃음)

-모두 잘 지내고 계시던가. =잘 지내실 거라 생각했다. 맨날 대동강변을 조깅하면서 재밌게 사시는 것 같더라. 우리가 가기 직전엔 열흘 동안 단풍놀이를 가셨다고. 아파트 두 채에 나눠서 살고 있는데, 어쨌든 전부 특별대우를 받고 계신 건 분명하다. 그 중엔 남쪽에 고향을 두고 평양에 가신 분도 있는데, 그래도 나라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고향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싶다.(웃음) 하지만 그분들에겐 평양이 신념의 고향이니까.

-촬영은 전혀 못한 건가. =선생님들은 찍지 말라고 해서 소리만 녹음했다. 그 외에는 그냥 풍경 스케치 정도. 어차피 뭔가 촬영할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북한을 직접 목격한 감회도 남달랐을 텐데. =(한숨) 듣고 상상했던 것과 직접 보는 건 너무 달랐다. 북한이 다들 못 산다는 건 익히 알지만, 그걸 확인하니 가슴이 아프고, 그런데도 사람들이 웃으며 손 흔드는 걸 보면 기쁘고. 묘향산 관광을 가기 위해 이동하는 2시간 동안 차 안에서 많은 걸 봤다. 다들 차가 없으니까 10km는 보통으로 걷는 것 같더라.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무조건 걸어다니고.

-민간인을 만나기도 했나. =주말에 성당에 보내줘서 갔더니 민간인과 함께 앉을 수 있었다. 미사를 보느라 얘기는 못했지만, 손도 잡아보고. (웃음) 그때 북한 사람들을 가장 가깝게 느꼈다. 남한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한마디씩 하라고 그러는데 모두들 고개를 한껏 빼고 경청을 하더라. 굉장히 관심이 크다는 걸 느꼈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다양성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 다양한 영화를 활성화시키는 일을 고민한다. 그간 영진위 위원회가 산업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이번 기수는 영화의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고, 안정숙 위원장이 사실 나보다 시야도 넓고 고민도 많은 걸로 안다. 여태껏 독립영화에 황무지 같았던 상황을 개선하려고 많이 논의 중이다. 독립영화 전용관도 그중 한 방편이고. 아트플러스에 대해서는 이걸 어떻게 다변화하고 독립영화의 거점이 될 수 있나 고민 중인데, 지금 생각은 2010년까지 전국에 100개관의 대안 배급망을 만드는 것 정도. 그걸 “넥스트플러스”라 부르려고 한다. 다양한 영화를 점유율에 관계없이 상영하는 공간으로 바꿔보고 싶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차기작 구상도 힘들 것 같다. =요즘은 내가 앞으로 몇년 동안 몇편의 작품을 만들 것인가 생각한다. 다작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현장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좀 애틋하다. 꼭 해보고 싶은 건 우리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과 해방 공간의 얘기를 다루는 건데 어머니가 좀 비협조적이다. (웃음) 일단은 상계동 사람들의 현재 얘기를 하려고 한다.

-자신의 첫 작품 <상계동 올림픽>을 돌아보며 뭔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내가 상계동에 들어갔던 게 벌써 20년 전이다. 아무래도 시작을 돌아보는 의미가 크다보니 내 얘기가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첨예한 쟁점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아무튼 여러 상황이 좋은 쪽으로든, 안 풀린 쪽이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철거투쟁 경험이 사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하고.

-푸른영상이라는 조직의 새해 비전과 개인적인 새해 각오를 듣고 싶다. =푸른영상은 안 변하는 게 비전이다. 다만 활동비를 좀더 많이 받아서 생계가 약간만 덜 불안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개인적인 각오야 많지. 이를테면 담배 끊기도 그중 하나인데, 우선순위가 좀 낮다. 우리 어머니가 담배 끊으면 인터뷰 해준다고 했다가 번복한 상태라서. (웃음) 그 핑계로 끊을까도 생각 중이고. 어쨌건 제일 큰 각오가 바둑 안 두는 거였는데, 그건 지켰다. (웃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