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김밥을 말기 위해 김 열한장에 기름을 발랐으나 제작과정에서 단무지가 오염돼… (중략) 맛살을 넣기도 전에 강모양이 바꿔친 거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KBS <개그콘서트>가 불쾌한 것들로 가득 찬 프로그램일 것이다. 민감한 사건을 대놓고 비꼬고, ‘문화살롱’처럼 고상한 문화 대담 프로그램을 패러디하며 진행자가 계속 ‘방귀’ 얘기를 하며, 게스트로 나온 고상한 성악가는 “결혼한 지 1년에 아들은 세살”이란 말을 태연하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왜 웃긴지도 알기 힘들다. 대체 왜 ‘제3세계’의 육봉달 선생이 “맨손으로 청둥오리를 때려잡고 떡볶이를 철근같이 씹어먹”은 것이, “너와 함께라면”이라 말하며 진짜 라면을 꺼내들고 “유치하지 않아”같은 말을 하는 ‘외인구단’이 웃긴지 설명하긴 힘들다.
<개그콘서트>는 시청자들에게 설명 대신 ‘이심전심’을 요구한다. 패러디나 비꼬기, 언어유희 등의 웃음의 기법이나 패러디되는 것들의 원본과 패러디의 맥락을 모두 알고 있지 않으면 웃을 수 없다. 순정만화부터 영화와 뉴스 심지어 홈쇼핑과 영화 시상식까지 소재로 이용하는 ‘예술속으로 GOGO’는 그 대표적인 예다. 장르의 관습을 알 만큼 대중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 결코 웃을 수 없다. <개그콘서트>의 웃음은 ‘이해’가 아닌 ‘감각’에서, 코너 내부의 내러티브가 아닌 TV 바깥의 트렌드와의 연결을 통해 나오는 순간적인 재치에서 나온다. 그래서 <개그콘서트>의 웃음은 ‘하드코어’하다. 이들의 개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화살롱’은 교양있는 사람들에 대한 통쾌한 조롱일 수 있고, ‘제3세계’는 언어유희의 극단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배제한다. 대신 자신들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더욱 강도 높은 웃음을 선사한다. 온 가족이 매주 똑같이 반복되는 개인기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면서 편하게 웃는 시대는 지났다. 드라마나 재연 프로그램에도 코미디는 들어가고, 인터넷으로 눈을 돌리면 수없이 많은 코미디가 등장하는 시대에, 개그 프로그램은 웃음의 보편성 대신 웃음의 ‘순도’로 승부한다. 공중파 TV는 점점 모든 이를 위한 매체에서 각각의 시간대의 시청자들을 위한 개별적인 매체가 되어가고, <개그콘서트>는 어느덧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코미디가 된 것이다.
공중파 TV가 그래서 쓰냐고? 안 그러면 우린 아직도 바보 캐릭터가 넘어지고 깨지는 것을 보며 ‘모두’가 ‘적당히’ 웃어야 했을 것이다. 이제 공중파 TV에서도 보기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진 않을까. 개그맨들이 늘 주장하지 않는가.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라고. 미칠 듯이 웃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서 한번 크게 웃자는데, 그냥 그들만의 ‘제3세계’려니 하자. 그게 모두 똑같은 내용에 똑같이 웃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