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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있수다] 느끼기 전엔 몰라
이종도 2006-01-16

작년에 잘한 일 가운데 하나는 처음으로 책을 써서 냈다는 거다. 옆자리에 앉았던 김혜리 기자의 배려로 <씨네21>이 펴내는 <필름 셰익스피어> 필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도, 탁월한 영화비평가도 아니다. 다만 셰익스피어를 ‘느낄’ 기회를 좀 더 많이 얻었을 뿐이다.

대학 마지막 해에 누더기가 된 학점을 기우느라 1학년 교양필수인 교양영어를 재수강했는데, 선생님은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드>(The Tragedy of Macbeth)를 보여주었다. 자막도 없이 억센 영국식 발음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빨려들었다. 그 감동의 힘 탓인지, 물어 물어 구로사와 아키라가 <맥베드>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蜘蛛巢城)까지 빌려 보게 되었다. 취업 계획을 바꾸고 대학원에 들어가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으면서 케네스 브래너와 구스 반 산트의 셰익스피어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시간에 다른 더 유용한 일들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기회비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너무 낭만적이고 철딱서니없는 짓일지 모른다).

관객에게 영화 한편은 탐색재라기보다는 경험재에 가깝다. 두 시간의 압축된 삶을 경험하고 느끼기 전엔 그 영화가 볼만한 것인지 아닌지 지식검색만으로는 알 수 없다. 비싼 입장료와 밥값, 교통비 등을 생각해볼 때 관객의 선택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두 시간을 가장 알차고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셰익스피어보다 <가문의 위기: 가문의 영광2>를 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객의 유치한 성향’을 한탄한다고 해서 이런 ‘합리적인 선택’이 바뀔 리 만무하다. 좀 더 합리적인 것은 학교에서 좋은 영화를 많이 보여주고 그런 기회를 통해 선택의 안목을 넓히게끔 하는 것이다. 만권의 교과서가 할 일을 영화 한편이 해낼 수 있다. 지루한 암송과 필기 따위 대신에 <매트릭스>로 철학을 얘기하고 <왕의 남자>로 조선의 당쟁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 젊은 관객들은 그 사다리를 올라타고 더 넓은 세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의 유치한 선택’을 한탄하는 일은 그런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