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지만 따뜻한 진실의 눈
“싫다는 감정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너무 다른 두 직장동료가 주춤거리며 서로에게 기대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잘돼가? 무엇이든>의 연출의도로 감독이 밝힌 문구다. 이것은 심드렁한 반어법일까 혹은 적대적인 강조법일까. 짐짓 차갑고 확신에 찬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지영과 순진무구한 얼굴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고도 모르는 척 상처를 주는 희진은 정말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경미 감독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역시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고, 그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삶에 대한 애착도, 잘살고 싶은 의지도 강할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의 연출의도는 수사가 아닌, 진심이다. 그는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하고 부족한 인물을 있는 그대로 찬찬히 이해하고 연민하며, 무관심보다는 부딪침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할머니의 임종까지 연기의 재료로 삼는 배우지망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디션>은, 어쩔 수 없이 속물적인 인물의 행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일면 차갑고 냉정해하지만, 관객은 결국 그럴 수도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네 사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오직 따뜻함만을 지녔다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두 주인공이 서로를 증오하는 계기가, 영화 속에서는 얼굴도 드러나지 않는 사장에게 있음을 우리는 안다.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권력이 작동하고, 방향을 잘못 정한 증오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무리없이 보여주는 치밀함을 지녔다.
디테일로 표현되는 치밀함과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바라보는 따뜻함은 이경미 감독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는 차근차근 열심히 배울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여태껏 만든 영화는 본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여고 시절의 동성애 감정을 다룬 <거짓말>, 사랑을 기억하는 두 젊음을 그린 <기억>, 영화 만들기의 고민을 다룬 <오디션>, 직장생활의 시시콜콜함에서 시작한 <잘돼가? 무엇이든>까지, 그의 모든 필모그래피는 점차적으로 ‘나이를 먹어왔다’. 이를 위해 감독 역시 매 순간의 변화한 시선으로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이경미 감독과의 만남 이후 막연한 믿음을 가져본다. 아마도 누군가 그의 영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를 건드린다면, 언제든 이를 경청하고 이에 대해 대답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시 무언가를 배워나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엇이든 잘돼갈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연극배우가 꿈이었는데 연극연출가셨던 아버지께서 제가 연극영화과 가는 걸 너무 싫어하셨어요. 결국은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아무 대학이나 가서 연극을 계속하겠다는 심정으로 원서도 대신 넣어달라고 했어요. 마감날 물어보니 러시아어과에 넣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때가 러시아와 수교도 맺고 약간 붐이 있었거든요. 학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부터 알아봤는데, 그만뒀어요. 대학에서도 연극을 하면 미칠 것 같아서. 고등학교 때도 집의 핍박이 너무 심해서 괴로운 기억이 많은데, 그 싸움을 계속하는 게 두려웠어요. 한동안 연극은 물론이고 쇼프로도 못 봤어요. 방방 뜨고 신나는 분위기를 보기만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냥 공부만 열심히 했어요. (웃음) 러시아어 공부에 들인 노력은, 직장에서 받은 돈으로 본전 뽑았죠.
-그러다가 어느 날 영화에 빠져든 건가요. =우연히 <그랑 블루>를 봤어요. 성당에서 특별상영 같은 걸 할 때였는데, 그날 당장 비디오 가게에서 <그랑 블루>를 빌려서 5번 봤어요. 그 전에 본 영화는 아버지 허락받고 동시상영관에서 봤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랑 <공작왕>이 전부였죠. 직장 다니면서는 생활이 팍팍해서 인터넷 영화동호회를 들었는데 누군가 영상원이라는 학교에 원서를 냈다더군요. 그때 마침 다시 연극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다른 연극영화과는 수능이나 실기가 필요한데 영상원은 그게 아니라니까, 일단 거기 들어가서 연극원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원서를 넣었어요. (웃음) 언젠가 갑자기 다른 공부를 하겠다면서 유학을 떠난 친척언니가 저한테, “경미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저지른 다음에 수습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더군요. 저는 제가 기회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영상원에 붙었을 땐 이게 드문 기회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입학시험 땐 콘티도 모르는 무식한 애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영상원 입시 면접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나요. =그때는 얼굴도 몰랐던 박광수, 김홍준, 박종원 감독님 등이 면접관이셨는데, 김홍준 감독님이 저보고 언제쯤 감독 데뷔할 수 있을 것 같냐기에, 졸업하면 서른한살이니까 데뷔는 서른세살쯤 할 것 같다고 그랬어요. 박광수 감독님이 쳇, 이러셨죠. (웃음)
-영상원 동기들에 비해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없어서 열등생 시절이 있었겠어요. =입학시험 때 콘티를 그리라는데 콘티가 뭐냐고 질문을 할 정도로 무식한 애였어요. (웃음) 힘들었지만 그게 자극이 됐어요. 저는 원래 자극을 받아야지 열정이 생기거든요. 연극도 집에서 그렇게 반대를 하니까 더 애정이 생긴 것 같고. 그리고 예전에는 힘든 일이 있으면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빠졌을까 생각하면서 자학했는데, 영화를 하니까 내가 겪는 일들이 다 자양분이 되겠다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감독님 영화 중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배우지망생이 이를 따라해서 오디션에 합격한 <오디션>의 결말이 떠오르네요. =음, 그 영화는 제가 당시 갖고 있던 어떤 죄책감 때문에 하게 됐어요. 실제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닌데, 어떤 배우가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걸 들었어요.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어떻게 그럴 수가’인가요, ‘나도 그러는데’인가요. =나도 그럴지도 모르는데, 가 맞아요. 영화의 결론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원망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게 서글프다는 생각. 고민이 많았던 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그 전에 만든 단편은 익숙한 소재를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는데요,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떠올리는 <거짓말>은 교차편집,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기억하는 두 남녀가 사실은 과거에 연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억>은 미스터리 화법을 도입하고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어떻게 보는 사람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였어요. 특이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니었죠. 디테일이나 캐릭터를 중요시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것을 어떻게 영화적인 구조로 접근할지도 중요하니까. 제가 원래 교차편집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잘돼가? 무엇이든>에서도 회사에 불이 나는 것을 상상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처리한 교차편집이었고.
캐릭터와 디테일에 관심이 있어요
-<잘돼가? 무엇이든>을 다시 봤어요. 처음엔 순진무구한 얼굴로 짜증을 유발하는 희진의 캐릭터가 워낙 막강해서 외강내유형의 지영에게 감정이입을 했는데, 이제 보니 지영 역시 만만찮게 꼬인 인물이더군요. =맞아요! 내가 지금은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글을 쓸 거야, 라면서. 현실 안에 싹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는 뭐인 양 관조하는 애죠. 원래는 지영은 제 동생, 희진은 동생의 회사친구가 모델이었는데, 영화로 막상 만들다보니 제가 가진 극단적인 양쪽이 과장되게 들어간 식이 되더군요. 친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제가 희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지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슴에 칼을 품고 있다가, 누군가가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상처를 입게 되는 지영의 꿈이 등장하죠. 지영을 치고 지나간 사람이 문제일까요, 칼을 품은 지영이 문제일까요. =(망설임없이) 지영이죠. 하지만 그래서 지영이 바뀌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씩 보완하고 이해하면서 살아야죠. 바꾸기는 힘드니까. 지영에 대한 안쓰러움은 있었어요. 상처받는 건 자신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그러면서.
-본인의 성격도 그렇다는 얘기일 텐데, 몇번 만난 바로는 안 그럴 거 같았어요. 혹시 영화를 하면서 성격이 변했나요. =칼을 품고 살았죠. 예전에는 너그러운 시선도 없고, 용서도 잘 못 하고. 지금은 좀 무뎌졌어요. 그게 있어야 오기, 욕심, 에너지가 생기는데, 별로 좋지도 않아요. (웃음) <잘돼가? 무엇이든> 시나리오를 쓰는데, 엔딩이 따뜻했으면 하는데, 내가 따뜻하지 않으니 거짓말로는 못 쓰겠더라고요. 그러면 내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임신부처럼 노력했어요. 좋은 것 보고, 좋은 생각 하려고. (웃음) 그러다보니 좀 변했어요.
-그냥 결말을 냉소적으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를 변화시키기까지 한 걸 보면 그러고 싶지 않았나봐요. =네. 그 전에는 싫어하는 사람에겐 절대로 마음을 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어요. 영화의 마지막 이후 지영과 희진은 또다시 삐거덕댈 수 있겠지만 예전하고는 좀 다르겠죠.
-요즘엔 졸업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또 다른 독립장편을 찍는 경우도 많은데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를 했죠. 어떤 배경에서 선택했나요. =꼭 현장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현장에서 감독이 자기가 원하는 걸 어떻게 취하는지에 관해서 배운 게 많아요. 이를테면 어떤 순간엔 원래 원하던 걸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상황이 와요. 카메라 움직임이 복잡한 장면인데 포커스가 안 맞거나, 합이 안 맞아서 계속 NG가 날 때. 나같으면 고지식하게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 박찬욱 감독님은 빨리 포기하고 더 좋은 대안을 만드시더라고요.
3월까지 시나리오 1고 내는 게 목표예요
-현재는 <친절한 금자씨>를 제작한 모호필름에서 데뷔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어떤 얘기인가요. =음, 이번에도 캐릭터가 강한데, 사이코 같은 여자가 나오고, 두명의 주인공이 서로 거짓말을 해요. (웃음) 그러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거죠. 거짓말로 잡아먹히는 얘기는 많은데, 진심에 닿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재밌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시간을 교차하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등 구조로 장난치는 걸 좋아했는데 <잘돼가? 무엇이든>부터는 디테일로 흥미를 끌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요. 내년 3월 정도까지 시나리오 1고를 내는 게 목표예요.
-가만히 살펴보면 충무로에서 세편 이상 영화를 만든 여성감독이 한명도 없어요. 여성감독으로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나요. =(조심스럽게) 그건… 여성감독들이 좀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갖고 성찰하는데, 관객은 화려한 형식과 볼거리를 좋아하고, 그러다보니 여성감독의 성향이 좀더 소외되기 쉬운 게 아닐까 싶어요. 저의 경쟁력은 캐릭터와 디테일이라고 믿는데(웃음),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이 재밌게 볼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가 과제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