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명윤리라는 말 정도는 누구나 익숙하게 됐다. 그런데 우린 그 전제인 생명에 대해서 과연 아는 걸까? 생명이란 건 대체 뭘까? 정자와 난자는 생명일까? 생명인 건 맞지만 인간은 아닐까? 그렇다면 돌 같은 무생물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기억은 생명일까? 그럼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일까? 현대는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다. 사이버펑크는 기계를 통해서 인간의 확장을 꿈꾸고, 육체와 정신은 서로 침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이라 착각하는가 하면, 신비주의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생명이란, 단순히 상대적인 개념 아닐까? 흔히 지구는 살아 있다 말하고, 가이아 이론도 있기는 하지만,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란 것은 일종의 은유다.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현대 과학으로 단정할 수 없다. 아니 단정은 가능하지만 그게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맨 인 블랙>에서 말하듯 이 우주는 외계 어떤 존재들이 갖고 노는 공기돌일 수도 있고, 우리가 보는 물방울 하나에 억겁의 우주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생명인 동시에, 생명이 아닐 수도 있다. 너무 모호한가? 혹은 엉터리일까?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는 벌레를 잡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벌레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징그럽고 조그만 것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충사>의 벌레들은,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주 먼 옛날 낯익은 동식물과는 전혀 다른 기괴하고 하등한 무리들. 사람들은 그런 이형의 무리들을 두려워했고, 언제부턴가 그것들을 가리켜 벌레라고 불렀다… 벌레는 생과 사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 생물인 듯하면서도 무생물 같은, 죽어가면서 살아 있는 존재.’ <충사>는 그런 벌레들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뭔가 문제가 생기고, 충사가 그것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종의 벌레 해결사인 셈이다.
<충사>는 벌레라는 가상의 생물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눈 속의 빛’이란 에피소드에서 깅코는 말한다. ‘인간은 빛을 손에 넣었을 때 두 번째 눈을 감는 법을 잊었다. 두 번째 눈, 진짜 어둠, 이질의 빛… 우리 발밑을 헤엄치는 무수한 생명체 무리들.’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고통이 따른다. ‘싫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죽여야만 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기 때문에.
하지만 언젠가부터 인간은, 다른 생명의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벌레들을, 다른 생명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죽여도 된다고 믿었다. 그건 오만이고, 탐욕이다. 깅코가 보통의 충사들과 다른 이유는, 벌레를 인간과 동격인 ‘생명’으로 포용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충사는 벌레를 퇴치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다. <충사>가 말하는 벌레는, 결국 우리와 동일한, 그러나 다른 형태의 생명인 것이다. 그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우리를 알 수 없는 타자들이, 이 세계에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