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비열하고 잔인하지만, 우리 사회의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말이었다. 타고난 신분을 수긍하고 가난을 감수했던 20세기 이전과는 달리, 현대사회는 ‘모든 사람이 돈과 권력, 명예, 명성, 메달을 향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체제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다수가 낙오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당연히 ‘패배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종으로서 인간은 진화의 무수한 굴곡을 넘어온 고독한 승자이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모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에 가깝다.’
<위대한 패배자>는 그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패배자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당대에는 패배자였지만 역사의 승리자가 된 롬멜과 체 게바라가 있고, 라이벌에게 처절하게 짓밟혀 이름마저 잊혀진 하인리히 만과 렌츠, 라살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자신을 지옥으로 끌어내린 오스카 와일드와 크누트 함순 같은 이들도 있다. 그저 웃음거리 이상이 아닌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 같은 기묘한 패배자도 있다. <위대한 패배자>는 ‘주어진 기회를 포착해서 결연하게 밀고 나간 사람들’ 중에서 ‘특히 비극적이거나, 특히 극적이거나, 특히 창피한 방식으로 무릎을 꿇은 패배자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준다.
승리자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던 독일의 저널리스트 볼프 슈나이더가 <위대한 패배자>를 쓴 목적은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아름다운 패배’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은 말이다. 패배자에게는 뭔가 이유가 있다. 레닌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던 트로츠키는 ‘나는 혼자 머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렌츠는 꽤 유명해진 뒤에도 필명으로 희곡을 발표하는가 하면, 써둔 원고들을 묶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좋은 패배자란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인 것이다. 반면 자기선전에 능하고, 조직과 정보에 기민하고 탐욕적이며, 지독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가진 이들은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진정한 패배란 과연 무엇일까? 앨 고어가 패배를 인정하고 ‘위대한 패배자’가 되었지만, 그 덕에 세계는 더욱더 진창으로 빠져들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패배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보았다면 어떨까? 게다가 패배의 이유가 승자의 비열한 모략과 사기 때문이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좋은 패배자’에 만족해야 할까?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승자의 비열함과 기만을 폭로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폭로나 고발이 소인배나 배신자로 비난받는 이유는, 결국 역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승자의 시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진정한 패배자란, 타인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릎 꿇은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패배가 아니라, 스스로를 나락으로 끌어내린 오스카 와일드나 크누트 함순 같은 인물. ‘부자연스러운 미덕보다는 오히려 골백번이라도 부자연스러운 악덕을 저지’르는 패배자들. 그들 이외의 패배자란, 그저 단순한 2등이나 3등일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1등을 꿈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