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8월의 어느 주말, 미국 뉴욕주 우드스탁 근처의 한 거대한 농장에 40여만명의 사람이 모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거대한 행사는 표면적으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화의 물결이 동부에서 낳은 아이와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몬터레이와 뉴포트 등지에서 대규모 공연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우드스탁은 일개 공연이 아닌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불린다. 혼돈과 격변의 시간인 1960년대 말, 우드스탁에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 반권위·반전을 외치고 공동체와 대안사회를 실험하고자 했으며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때론 환각제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했고, 개최지가 재난지역으로 선포되기도 했으나, 1969년 여름의 3일은 분명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순수의 순간이었다. 그 3일의 기록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영화가 특정 시공간을 기억하는 매체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이후 ‘로큐멘터리’의 표준이 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뮤지션의 연주 장면과 관객의 모습이 절묘한 비율로 기록되어 있다. 크로스비, 스틸스 앤드 내시, 더 후, 조 카커가 각각 대표하는 포크, 록, 블루스 음악이 눈과 귀를 흥분시키는 만큼 마음을 뒤흔드는 건 뛰어다니는 아이, 나체로 수영하는 사람, 진흙탕에서 미끄럼을 즐기는 사람, 껴안고 자는 연인, 공연 뒤 쓸쓸히 걷는 사람의 풍경이다.
우드스탁은 어쩌면 실패한 실험일지 모른다. 제리 가르시아는 훗날 “문은 금방 닫혔다”고 말했으며, 우드스탁을 흉내낸 ‘와이트 섬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조니 미첼(<우드스탁>을 작곡한 그녀다)은 변질된 이상을 아쉬워했다. 그건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진 무정부주의자의 말로일까? 아니면 쾌락주의에 빠져 행동하지 못한 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결과일까? 그러나 영화에 대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라면 괴로울 법하다. 곧 실낙원으로 쫓겨날 줄 모른 채 꿈을 나누던 자들을, 그리고 이후 한명씩 죽어간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키스 문, 제리 가르시아를 비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DVD는 개봉 25주년을 맞아 발표된 감독판을 수록하고 있다. 40여분이 추가된 감독판엔 재니스 조플린, 제퍼슨 에어플레인, 캔드 히트의 공연이 드디어 실리게 됐고,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도 좀더 수록됐다(하지만 그레이트풀 데드는 여전히 없다). 외국 출시본과 마찬가지로 부록은 없으나, 한국판은 양면 디스크였던 해외판과 달리 두장의 디스크로 나눠 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