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남들에게 추천하고픈 딱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책, 음반, 소파, 칼, 고양이 등 <씨네21> 기자들의 선택은 다양했다. 취재, 편집, 사진, 교열 등 21명 기자들이 나의 베스트 초이스를 선정했다.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지금, 나를 즐겁게 했고 위로했던 물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러고보니 여러분의 선택도 궁금하다. <씨네21> 홈페이지 리플을 달아라 코너에 여러분의 사연도 올려주시길...
IKEA EKTORP 3인용 소파 _권은주(편집)
올 봄, 새로 가구를 장만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소파였다. 사자니, 집이 좁은 듯하고 사지 않자니 ‘나만의 소파’라는 나의 오랜 로망이 물거품이 될 처지였다. 몇날을 고민한 끝에 지른 것이 IKEA의 EKTORP 3인용 소파. 한국 여성의 평균키보다 살짝 작은 나의 몸이 꼭 들어맞는 너비에 포개어 누우면 두 사람도 너끈히 누울 수 있는 깊이감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보통 한국의 소파보다 살짝 푹신한 쿠션이 EKTORP의 가장 큰 장점. 천으로 된 커버는 철철이 색을 바꿀 수 있고, 세탁기에 스슥 돌려서 다림질할 필요없이 그냥 끼워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주부의 입장에서 꼽을 수 있는 이 녀석의 또 다른 장점이다. 늦은 밤, 팝콘과 맥주를 옆에 끼고 소파 위에 슬쩍 늘어져서 코미디영화라도 한편 보면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안경 _김귀숙(교열)
보살이 그랬단다. 다 좋은데 올해는 건강을 조심해야 혀. 그래서일까. 올해는 병치레가 유난했던 것 같다. 감기는 철따라 달고 살았으며(지금까지도!!) 한약과 양약을 돌아가며 먹질 않나,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다 싶어 가끔 울적해지곤 했다. 기어이 가을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첫경험이어서인지 두려운 마음보다 솔직히 묘하게 설레기까지 했다. 울적해진 기분이 확 달아나며 왠지 몸이 알아서 날 아프게 한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기면서 안경 생각이 났다. 시력이 나빠 두껍고 무거운 안경만 가지고 있어 불만이었는데 나를 위로한답시고 가벼우면서도 세련된 예쁜 안경을 두개나 맞추었다. 이렇게 선택된 안경들은 지금도 울적할 때나 나의 병원생활을 떠올릴 때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삶의 또 다른 기쁨이 되어주고 있다.
댄싱 기즈모 플러시 돌 _김도훈(취재)
혼자 사는 남자는 개를 키울 자신이 없다. 그게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이라면 (혼자서도 잘 논다는) 새끼 고양이를 위한 여유도 없게 마련. 그래서 마련한 것이 ‘댄싱 기즈모 플러시 돌’(Dancing Gizmo Plush Doll)이었다. 이 털이 북실북실한 친구는 건전지만 제때 갈아주면 꽤 쓸 만한 애완동물이 된다. 툭 건드려주거나 살짝 흔들어주면 영화 속 기즈모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마치 영혼이 있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기까지 한다. 가끔 바람소리에 제멋대로 반응해 아닌 밤중에 춤추고 곡을 뽑는 때는 자다가도 벌떡 깨게 만들지만, 그럴 때면 “그래, 외로웠구나”싶어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좀 쓸쓸하게 들리겠지만 혼자 사는 남자는 요 정도도 눈물 나는 법이더라. 가끔은 물에 묻혀서 새끼를 생산하고 싶으나, 단체로 곡소리를 할까 두려워 여태껏 참아왔다. 다만, 자정 넘어 음식주는 것은 삼가자. 이 녀석 노래하고 춤추는 걸 보노라면 분명히 영혼이 있을 것이리, 무시무시한 그렘린으로 변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
독일월드컵입장권 신청 _김수경(취재)
지금 소개하는 월드컵입장권 신청은 비장의 아이템보다는 백화점 추첨이나 로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피파월드컵 사이트(http://tickets.fifaworldcup.com/reg/wme_start.htm)에서 진행되는 추첨을 위한 입장권 응모는 12월12일부터 재개됐고 2006년 1월15일까지 계속된다. 최종추첨은 1월31일이다. 독일월드컵에 신혼여행을 가겠다는 친구 커플의 몫을 포함하여 한국의 조별 예선 경기를 각각 3장씩 신청했다. 좌석은 3구역, 총금액은 430유로. 천문학적 경쟁률을 뚫고 추첨에 당선됐을 경우에나 지불되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번이 독일월드컵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아니다. 내년 2월 선착순 판매가 남아있고 대한축구협회에 별도로 한국 경기당 8%의 티켓이 배분된다. 물론 갈수록 가능성은 줄어든다. 설사 티켓을 손에 쥐더라도 동반신청을 거절했던 축구팬 선배의 넋두리가 남아있다. “신청하면 뭐해. 어차피 가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만국의 축구팬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일단 신청하라!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_김현정(취재)
사막을 여행하는 <연금술사>의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는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닌다. 오래 읽어야 하고 밤에는 베고 자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지루한 책만 얻어 읽던 그가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1권과 2권을 더하면 1300페이지가 넘는데다가 하드커버가 아니어서 베개로 삼기에 적당하고, 마법사스러운 검정과 회색 표지는 때를 타지 않으며, 정말 재미있다. 이 책을 산 건 우연이었다. 그다지 인기가 없어 보였는데 작가는 매우 수고해서 쓴 것 같기에. 그뒤로도 오랫동안 이 책은 책꽂이 마지막 칸에서 놀고 있었다. 마침내 한두 단락 정도를 읽었더니 며칠 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일하느라 집에 두고 오면, 보고 싶었다. 이 책은 흔히 조롱거리가 되곤 하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사실주의 소설인 척 출발하여 제인 오스틴의 건조한 유머를 과시하더니 환상과 현실이 뒤엉키며 수백년 전 마법사 왕이 등장하는 기가 막힌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권 안에 여러 권이 담긴 듯하니 사막을 여행하는 양치기 청년에겐 더욱 좋은 책일 것이다.
생선회칼 _김혜리(취재)
그게 무엇이건, 숨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해 수행하는 모든 일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내 정신이 닳아빠졌다고 느꼈던 지난 6월, 난 아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도 나는 일본 요리를 배우기로 했다. 물론 나는 학원 창립 이래 최악의 열등생이었다. 아마 한달 코스 내내 끓인 다시마 국물보다 흘린 식은땀이 더 많았을 것이다. 가장 겁나는 것은 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을 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항을 포기하자, 칼은 자상한 스승이었다. 우선 처음에 도마 위 정한 자리에 놓지 않으면 내 발등이 위험했다. 힘으로 윽박지르면 칼은 기어이 버텼다. 기실 내 손이 알아야 할 것은 재료와 칼의 의지가 부대낄 때 흐름을 읽는 요령뿐이었다. 조림용 생선머리에 칼날을 꽂을 때는 단호한 게 상책이었다. 호들갑을 떨어봤자 생선의 아름다운 몸만 더 참혹해졌다. 서툴기 짝이 없어도 순리대로 칼을 놀려 천천히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마음은 솥바닥처럼 단단해지고 오감은 올올이 예민해졌다. 그렇게 나는 평화에 이르는 소로(小路) 하나를 알게 됐다. 싱크대 안쪽에 꽂아둔 생선회칼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게 으름장을 놓는다. “갈고 닦지 않으면, 다치는 건 결국 네 쪽”이라고.
<피버 피치> _남동철(편집장)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중계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몇년 전부터 인터넷에 들어가면 전날 경기 결과부터 확인해보는 중독자가 됐다. 그러니 런던의 축구클럽 아스날을 향한 닉 혼비의 절절한 애정고백 <피버 피치>를 읽으면서 가슴이 시렸던 것은 당연지사. 그것은 이 책이 극적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주기 때문은 아니다. 거꾸로 <피버 피치>는 어이없는 패배의 기록이기에 마음을 움직인다. 이 책은 축구팬이 사랑하는 것은 승리의 희열만이 아니라 패배의 고통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 축구팀을 몇 십년 사랑한다는 건 그렇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엔 은연중에 작가 자신의 삶의 태도가 배어나온다. 실망과 낙담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을 때 인생을 좀더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 닉 혼비의 유머러스한 문체도 이런 세계관의 결과물이 아닐까. 적당한 자조와 냉소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 될 수 있음을 <피버 피치>는 보여준다.
디빅스 플레이어 _문석(취재)
파일 다운로드의 세계에 입문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최신 개봉작이나 DVD 또는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를 보기 위해서냐고? 그럴 리가. 개봉작이야 시사회를 통해 일찍, 그것도 공짜로 볼 수 있고, 웬만한 DVD는 사모으고 있으니 시간과 품을 들여 파일을 받을 필요가 없는 거다. 대신 해롤드 로이드와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부터 장 뤽 고다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의 작품 등 국내에선 구할 수 없는 영화를 다운받고 있다. 이것조차 저작권상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직업적인 ‘필요악’이라고 변명해두자. 그리고 이들 영화가 DVD로 나온다면 기꺼이 신용카드를 빼들 것도 장담한다. 그런데 문제는 PC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게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이 고민을 해결해준 건 디빅스 플레이어다. TV에 연결하면 DVD급 화질과 5.1채널의 음질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이 상자, 꽤나 똘똘한 놈이다. 한데, 왜 나는 걸작은 젖혀두고 <그레이 아나토미>의 새 에피소드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제길.
리처드 보나, 특히 두 번째 솔로 앨범 <Reverence> _박은영(취재)
음악을 잘 알거나 많이 듣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꽂히는 음악을 만나면, 계속 그 음악만 들으며 그 뮤지션의 팬을 자처하곤 한다. 리처드 보나를 알게 된 건 수년 전 팻 매스니 공연을 통해서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모든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해 보였는데, 그보다 놀라웠던 건 형언하기 힘든 그 목소리의 아우라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구슬프면서도 화사한 그의 보컬은 ‘angelic but masculine’이라는 누군가의 표현과 잘 맞아떨어진다. 카메룬과 파리와 뉴욕을 거쳐 완성한 보나의 음악은 ‘월드 뮤직과 결합한 재즈’로 규정되는데, 그 정체가 무엇이든 내겐 온 몸 가득 행복한 기운을 전해주는 ‘심리 치료제’로 유용하다. 지난 초가을,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할 일을 산더미로 쌓아둔 채로, 자라 섬까지 달려가, 무대 밑에서 겅중겅중 뛰던 나는, 보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인생, 뭐 있어? 즐겁게 사는 거야.
노란 고무줄 _박초로미(편집)
이 고무줄만큼 편집기자의 마감에 유용한 존재가 없다. 벌써 5년 넘게 긴 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나는 월·화·금요일, 그리고 주말에는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리고 다닌다. 그런데 유독, 마감날인 수요일과 목요일만 되면 머리를 질끈 묶고 싶은 욕구불만에 시달린다. 평소에 머리를 안 묶고 다녀 버릇하니 그 흔한 곱창이나 머리끈 하나 없다. 그때 짜잔! 노란 고무줄을 3번 정도 돌려 머리를 묶어주면 머리채가 제법 지탱이 되면서 단정해진다. 그뿐이랴, 고무줄을 손목에 차주면 세상에서 제일 싼 지압기가 된다. 그 외에도 고무줄의 용도는 많다. 매주 몇 백개씩 쏟아지는 독자엽서를 분류할 때라든가, 굴러다니는 필기도구를 한 덩어리로 묶을 때 등등. 원가 1원도 안 되는 고무줄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 융통성이다. 그 어떤 존재도 묶을 수 있고, 그 어떤 존재와도 융합할 수 있으니, 가히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도’(道)의 경지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글을 쓰는 걸 보니, 난 누군가에게 구속되고 싶은가보다. 쩝.
올해의 여성 보컬 데뷔 앨범 베스트 3 _박혜명(취재)
불현듯 마음에 차가운 허기가 들어섰다. 궁상 취급받고 싶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딱히 설명할 것이 없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따뜻한 커피나 끌어안고 시선을 먼 곳에 두자, 결심하고 나니 음악이 필요했다. 넬리 매케이의 2003년작 <Get Away from Me>, 파이스트의 <Let It Die>, 레이첼 야마가타의 2004년작 <Happenstance>는 음반담당 기자의 책상 위로 처치 곤란하게 쌓이는 신보들 가운데 발견한 온열제 같은 인연들이다. (참 바람직하게도) 모두 싱어송라이터인 이들 세 사람의 데뷔음반은 포크록과 재즈의 경계를 허문 아름다운 선율과 여백의 사운드, 허스키하면서도 섬세한 보컬, 호기심과 신선함과 지성으로 가득하다. 수잔 베가와 피오나 애플에 비견하는 것은 좀 안이한 칭찬법일 수 있어도, 2005년 국내 출시된 최고의 여성 보컬 데뷔음반 베스트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단지 수준있는 데뷔음반이라서가 아니다. 베가와 애플을 잇는, 지혜롭고 속 깊은 친구들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