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비관주의’(cultural pessimism)라는 말이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간단한 말이다. 이런 태도를 대화체로 표현하면 이렇다.
“요즘 음악들은 쓰레기야. 도대체 들을 게 없다니까.”
“음악은 비틀스로 끝났어. 그 이후로는 소음일 뿐이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문호는 왜 더이상 나오지 않는가?”
“인상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은 사기다.”
“요즘 영화가 1970년대보다 나아진 게 뭐 있나? 특수효과만 발전했을 뿐.”
같은 태도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과거는 황금시대였으나 현재는 한심한 시대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더욱 퇴보하리라는 것. 별로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석에서 심심찮게 이런 견해들을 접할 수 있다. 이 비관주의자들은 당대의 모든 예술 장르에 적대적이다. 그들 눈에 비친 요즘 예술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아예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들은 요즘의 문화적 생산물에 대해 무지하다.
그런데 이 비관주의적 견해들은 언제 들어도 솔깃하다. 반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을 비판하고 미켈란젤로를 옹호하는 비관주의자가 있다고 치자.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 걸린, 요즘 잘나가는 화가의 설치작품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견주어 비판할 때, 비관주의자는 전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검증이 끝났지만 현대의 화가는 아직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세계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의 저자, 이를테면 알베르 카뮈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를 거론하며 ‘요즘 소설들은 깊이가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의 견해에 맞서기는 어렵다. ‘깊이가 있다, 없다’ 같은 개념들이 논쟁의 어젠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자. 무엇보다도, 우리 당대의 작품들은 이제 막 생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작품이 <이방인>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자들은 비관주의자들에 비해 현저히 불리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과연 과거가 그토록 황금시대였는지 금세 의심스러워진다. 그때 역시 좋은 작품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를 작곡하던 시대에 베토벤도 살았으니 황금시대로 보이지만 그 시대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됐을까. 현대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자주 모차르트가 연주되는 시대이며,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시대다. 창작의 측면도 과거에 비할 바 없이 풍성해졌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전세계 전역에서 창작되고 연주되며 음반으로 만들어져 다른 문화권으로 전해진다.
비틀스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시대를 개탄하고 과거를 그리워했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이런 일은 모차르트나 플로베르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그들이 격렬히 비난하던 시대는 어느새 ‘황금시대’로 격상되곤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젊어 한때 그토록 새로운 음악과 문학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왜 문화적 비관주의자로 변해가는가. 아마도 무엇보다 그것은 새로 생산되고 있는 당대의 문화적 생산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지를 감추는 데에는 문화적 비관주의라는 벙커가 필요하다. 이미 검증이 끝난 흘러간 시대의 대가들이 그들을 엄호해줄 것이다. ‘철없는’ 낙관주의자들은 대가들이 지켜주는 그 신성한 벙커를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들, 현대의 예술을 옹호하고, 당대에 생산되는 새롭고 신선한 작품들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낙관주의자들은, 그저 그 철벽 벙커를 우회할 뿐이다. 비관주의자들이 투덜거리는 동안 문화적 낙관주의자들은 안개를 뚫고 전진해나간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달콤한 비관주의를 전파할 때,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옮기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이야말로 우리의 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