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의식 속에는 서부극이 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를 잘 모른다. <유레카>로 2000년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았지만 그의 영화는 한국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기 힘들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있었던 특별전 상영을 위해 방한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묻고 싶은 게 많았던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지도 10여년, 여전히 감독이라는 말이 낯설다는 그는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대해 “그저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영화라는 덫에 빠진 것은 아닐까”라고 탄식한다. 그가 영화에 묶인 수인이기를 바라는 것은 관객으로서 버릴 수 없는 열망이 되어버린다. <헬프리스>나 <유레카>를 당신이 보았다면 더더욱.
-고등학교 때 록밴드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음악이 아닌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등학교 때 음악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고향에 남았다. 나는 혼자 도쿄로 가 대학에 진학했다. 함께 음악을 할 친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밴드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영화가 내 생활을 장악해버렸다. 음악을 하는 것은 여전히 즐겁다. <쉐이디 글로브>에 쓰인 노래들은 모두 내가 만든 것들이다. 영화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지옥의 묵시록>을 보면서다. 당시 이런 영화를 내가 만들 수 있을까,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고다르의 영화들을 보고 나서 이런 영화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대학 시절 일본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연을 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때부터 문필 실력이 대단히 좋았다던데, 평론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나. =평론가가 되려 한 적도 있다. 대학 때 알던 사람 덕분에 <카이에 뒤 시네마 재팬>에 들어가 평론을 하기도 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연출의 길에 들어섰다.
-당신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조감독을 지냈지만 영화를 찍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은 거의 없어 보인다. =나도 구로사와처럼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다. 다만, 구로사와 이상의 것은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공포영화는 섣불리 건드리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웃음) 그래서 구로사와가 하지 않는 것을 하기로 했다. 구로사와의 무의식 속에 공포영화가 살고 있다면 나의 경우는 무의식 속에 서부극이 살고 있다. 서부극 안에 내 무의식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호숫가 살인사건>의 원작 소설은 스릴러인데, 영화는 공포 분위기가 강했다. 공포의 요소를 끌어들이며 구로사와 기요시적 분위기와는 다른 점을 어떻게 포착했는가.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게 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것. 구로사와와 내가 그 암묵적인 선을 가장 위태하게 넘나들었던 게, 둘의 세계가 가장 가깝게 표현됐던 게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와 나의 <호숫가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호숫가 살인사건>을 연출하면서 더이상 공포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존 카펜터 스타일이 되니까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수위를 조절하느라 애먹었다
-<유레카>를 흑백이 아닌 모노크롬으로 찍은 이유는. =<유레카>를 찍으면서 한 생각은, 이 영화를 찍는 것이 90년대 중반의 여러 사건, 나와 함께 살았던 전후 세대에 대한 추도, 애도 작업이라는 것이다. ‘전후’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과연 ‘전후’는 끝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벼랑 끝이라는 느낌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장례식이라면 흑백이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이야기는, 삶은 계속된다는 면에서 모노크롬으로 가자고 다무라 마사키와 이야기했다.
-전후의 망령은 지금도 전혀 죽지 않고 있다. 정치적 보수성으로 봤을 때 일본이 전쟁 뒤에 치러야 했던 장례식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일본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 일본에는 헌법 구조의 문제가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문하면 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다. 영화를 통해 근본적인 의식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것 정도다. 행동이나 말이 필요할 때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오노 요코가 한 말 중에 “장기적인 낙관주의”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패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미래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믿음.
-당신 영화에는 아버지 세대의 죽음이나 결핍이 자주 그려진다. 당신이 바라보는 아버지 세대란, 아버지 세대의 영화란 어떤 것인가.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님도 장 뤽 고다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도 우리 아버지 연배다. 하지만 그 세대는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아버지 세대 영화인들과의 관계라는 것은 부정하는 게 아니라 서로 포섭하고 포섭당하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다르와 이스트우드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연결시키기 시작한 게 우리 세대다. 고다르적이면서 이스트우드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게 우리 세대다. 영화에서의 아버지 세대와 현실사회의 아버지 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서부극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서부극의 어떤 점이 당신을 그토록 매료시키는가. =서부극은 알레고리를 만들기 쉽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일본에서는 60년대 후반에 야쿠자영화가 유행했는데, 그건 야쿠자영화가 학생운동의 알레고리로 표현되고 읽히기 좋았기 때문이다. 서부극에서는 극단적인 상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타자가 만나서 검이나 권총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한다. 상반된 입장에 선 두 사람이 대결한다. 마지막 정통 서부극이라고 하면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말할 수 있는데, 거기서 선악 구조는 뚜렷하지 않다. 보안관이 악인지 킬러가 악인지, 창녀를 괴롭혔던 카우보이가 악인지. 그러나 선과 악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게 된다. 지금 일본의 상황을 그리는 데 어떤 알레고리를 쓸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서부극은 여전히 유효하다. 황야는 국가의 축소판인데 그 안에 등장인물을 집어넣어 사건을 일으키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다.
-<유레카>의 상영시간은 4시간에 육박한다. 하지만 <유레카>에서 상영시간은,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보는 사람들이 똑같이 체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가 어렵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건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영화를 체험해주었으면 한다. 관객이 주인공들과 함께 같은 것을 경험했으면 했다. 영화를 찍다보면 노이즈가 들어가는데, 그걸 다 제하면 2시간 내로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삶에서 노이즈를 뺄 수 있나. 살면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경험을 영화를 보면서 하게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웃음)
-도쿄영화미학교에서 여전히 강의를 하고 있나. =얼마간 하지 못했다. 극영화를 찍는 사이사이 7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찍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다 아키라라는, 프리 재즈 신에 영향을 끼쳤던 일본의 음악평론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는 1978년에 죽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는 식으로 만들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내년에 극장 개봉할 예정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나누어 하루 1시간 분량씩 볼 수 있게 할 생각이다. (웃음) 예전에도 음악가나 소설가의 다큐를 찍은 적이 있다.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나 음악평론가 아이다 아키라의 경우는, 그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빚진 것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찍었다. 뮤지션들로 말하자면, 내가 정말 다큐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
-당신이 주목하는 다른 영화감독들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스티븐 스필버그다. (웃음) 이제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대단한 일을 앞둔 듯한 느낌이랄까. 정확하게 말하기는 아직 힘들지만. 고다르와 이스트우드의 연장선상에 스필버그가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분명 그런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데뷔 이래로 당신을 가장 많이 뒤흔든 사건은. =음… 솔직히 말해서 결혼이다.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의 머릿속을 알고 싶어진 일.
-기획 중인 작품은 무엇인가. =눈이 안 보이고 말도 못하는 남자가 부인 같기도 하고 딸 같기도 한 여자와 살아가는 이야기다. 어른들의 동화 같은 느낌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