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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잭슨의 걸작 <킹콩> [4] - 프로덕션 과정 ②
박혜명 2005-12-26

4. 콩 vs 티렉스

애니메이터들이 10개 이상의 카메라 앵글로 재구성

칼 덴햄 일행이 해골섬에 도착한 이후부터 피터 잭슨은 관객을 롤러코스터에 실어버린다. 순수한 오락영화로서 99%의 순기능을 발휘하는 이 대목은 초식공룡 브론토사우루스가 육식공룡 카르노사우루스에게 쫓기고, 칼 덴햄 일행은 다시 브론토사우루스떼에게 쫓기는 겹겹의 체이스 장면으로 시작해서 콩과 티라노사우루스 가족 3마리(아빠, 엄마, 아기 공룡이 다 다르게 생겼다)와 앤 대로우가 뒤엉키는 협곡신에서 완성된다. 콩-티렉스-대로우의 협곡신은 개봉 전 kongisking.net에서 이미 공개되면서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잭슨은 <반지의 제왕> 후반작업 중에 이 부분의 액션 디자인과 애니매틱스 작업에 착수했다. 잭슨이 런던에서 <반지의 제왕> 스코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웨타의 1차 작업분이 도착했다.

전부 갈아엎은 1996년 시나리오에서 고스란히 살아난 이 대목은 “격투가 치열해지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섬 곳곳을 휘젓고 다니다”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다. “공룡이 콩을 잡아끌고 떨어지는데, 콩이 덩굴에 매달려 공룡과 싸우다 앤을 놓치고 그러면 앤은 살았나 싶었다가 다른 공룡 눈앞에서 대롱대롱 하고 있고, 콩이 그놈을 덮치면 앤은 다른 놈의 이빨에 매달려서…” 하는 식으로 잭슨이 계속 살을 붙여나간 액션은 애니메이터들이 10개 이상의 카메라 앵글로 재구성했다. 여기 등장하는 전신의 나오미 왓츠는 100% 디지털 스턴트인데, 육안으로는 전혀 실사와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 사용된 기술은 배우를 모형으로 삼는 컴퓨터 스캔 기술. 눈동자, 얼굴의 음영, 머리카락 심지어 옷자락까지 움직임을 예상해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기술을 동원해 잭슨은 “단숨에 흘러가는 파워와 스피드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원작의 알로사우루스보다 크고 흉포한 티라노사우루스를 콩과 대결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공룡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무섭고 광적이면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리얼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100% CG가 아니면 불가능했고, 일부러 핸드헬드숏과 스테디캠숏도 많이 써서 혼란스러워 보이도록 연출했다.” 다큐멘터리 식의 거친 리얼리티는 공룡의 디자인 컨셉과도 상통한다. 잭슨은 <킹콩>의 공룡을 과학적 근거에 충실해 만들지 않았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쿠퍼의 원작에 등장한 공룡들이 이미 (멸종했다는 시기로부터) 65만년 진화한 것들이다.” 작은 랩터류인 카르노사우루스는 그것의 과학적 원형보다 아메리칸 스테포드셔 테리어종에 의존해 디자인됐고, 티렉스의 피부는 크고 울퉁불퉁한 비늘로 덮였다. “스톱모션 시절의 괴수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공룡이라고 하면 악어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더 매끈한 피부의 공룡은 현대적인 해석이 적용되면서 나온 모델이다. 나는 고전기 영화에서 볼 법한 공룡을 재현하고 싶었다.” <킹콩>의 첫 번째 절정과도 같은 이 시퀀스는 결국 테크놀로지에 힘입은 고전 괴수들의 부활인 셈이다.

5. 콩 & 앤

앤디 서키스 목소리를 킹콩 소리로 자동 변환?

<킹콩>의 공동 각본가 프란 월시는 앤과 콩의 관계를 “에스메랄다와 콰지모도 같은 관계”라고 표현했다. 외로움 또는 상처 속에 스스로를 가둔 존재들끼리의 교감. 누군가는 ‘미녀와 야수’에 기대 로맨스로 읽을 수 있고 누군가는 언어없이 통하는 진실한 우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맨스든 우정이든 이 교감은 피터 잭슨의 리메이크를 아름답게 빛내는 보석 같은 요소다. 해골섬, 브로드웨이 거리, 센트럴파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장소를 옮길 때마다 깊어지는 둘 사이 교감의 흡입력은 촬영현장에서부터 만들어졌다.

디지털 캐릭터 콩의 소스가 된 배우 앤디 서키스는 나오미 왓츠가 콩을 대하는 모든 장면에서 함께 현장 연기를 했다. 여기에 쓰인 도구는 다음과 같다. 콩의 구강구조를 본뜬 커다란 틀니, 다리보다 팔이 긴 콩의 체형을 감안한 두툼한 검은색 고릴라 근육 옷, 약 7.6m인 콩의 키에 걸맞게 올라가 있을 만한 크레인 또는 사닥다리, 서키스의 목소리를 피치 다운시켜 콩의 울음소리에 가깝게 변환해주는 사운드 시스템 콩골라이저(Kongoliser, Kongalyzer 등 철자는 쓰기 나름이다). 센트럴파크가 CG로 배경처리될 것을 상상하고, 검은 고무옷의 서키스는 크레인 위에서 고릴라처럼 발을 구르며 기분좋게 으르릉으르릉 울었다. 왓츠는 오렌지색 센서가 붙은, 초록색의 솜방망이 같은 콩 손가락 안에 들어가 서키스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왓츠의 눈에는 어느 순간부터 서키스의 웃긴 분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났다.

앤디 서키스는 전체 메인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스튜디오에 남아 콩을 위한 촬영을 두달 더 했다. 웨타 스튜디오 한쪽에서 미니어처팀이 해골섬 정글 미니어처 촬영을 하는 동안 서키스는 몸에 60개의 센서, 얼굴에 132개의 센서를 붙이고 72대의 카메라에 둘러싸여 왓츠의 촬영 장면을 리뷰하면서 콩을 재연했다. 한손에 금발의 바비 인형을 들고. 서키스의 데이터를 콩의 것으로 변환하는 데 쓰인 기술은 모션캡처와 이미지모션인데,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 근육을 애니메이션화한다는 이미지모션은 <폴라 익스프레스> 때 소니픽처스이미지워크가 톰 행크스를 데리고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서키스는 콩을 연기하기 위해 르완다 야생보호구역에 머물면서 야생 고릴라 습성을 익히고 17가지 발성법을 연구했다.

6.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3D 애니메이션 맨하탄에 CG로 노을진 저녁하늘

잭슨은 오리지널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킹콩>을 리메이크하는 진짜 이유라고도 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콩 사이의 사이즈 비율이 맞지 않아 어색함이 눈에 띄기도 하는 원작의 6분짜리 마지막 시퀀스는 잭슨의 <킹콩>에서 2∼3배가 늘어나 있다. “만약 <킹콩>을 보고 관객이 단 한번 눈물을 흘린다면 그 순간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장면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잭슨은 원작에 등장하는 헬다이버종 복엽기를 자신의 영화에도 넣으려고 했다. 오래전에 단종된 헬다이버는 박물관에도 없었고 모형으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술팀은 마침내 미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엄 박물관에서 설계도면을 찾아내 비행기를 제작했다.

70테라바이트(1테라바이트=1000기가바이트. 미국 국회도서관 장서의 총 용량이 약 20테라바이트다)짜리 용량의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맨하탄 전경은 역시 CG로 디자인된 오렌지빛 파스텔톤 하늘과 함께 꿈처럼 펼쳐진다. 해골섬 절벽에서 본 풍광을 다시 한번 앤과 함께 바라보는 콩의 모습은 채광 낮은 노을빛에 비쳐봐도 늙고 지쳐 보인다. “콩은 나이가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오래 사는 동물일수록 덩치가 크다. 콩 정도의 덩치면 120살은 족히 살 수 있다.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외딴섬 깊숙한 곳에서 육식공룡들과 싸우며 외롭게 살아남은 자기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다.” 깊은 상처들, 부러져서 비뚤어진 턱, 제자리를 벗어난 이빨들, 뭉개진 눈썹, 축 늘어진 속눈썹까지 콩의 외관이 가진 특성은 어떤 것이라도 모두 그가 늙었고 거칠게 살아온 야생동물이라는 의미를 던진다. 잭슨이 설정한 해골섬은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곳 중 하나”다. 그곳의 역사를 짊어진 늙은 존재는 낯선 생김새의 금발 친구를 곁에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잭슨과 웨타의 스탭들이 만든 <킹콩>의 사실적인 세계는 그 너머의 순수한 판타지를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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