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인이 출세에 눈이 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임금의 후궁으로 들어간다. 사내는 그녀를 잊지 못해 내시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거듭되는 밀회의 꼬리가 안 잡힐 수는 없다. 곽일로의 대표작 <내시>의 스토리라인이다. 이 작품은 그해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평단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아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이듬해에 제작된 <속 내시>는 같은 작가와 감독의 작품이지만, 중종반정 직후의 권력투쟁에 끼어든 내시집단을 다루고 있어 스토리라인은 크게 다르다. 곽일로의 사후인 1986년에 리메이크된 이두용의 <내시>는 대체로 전편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되 윤삼육의 새로운 해석과 변용이 첨부된 작품으로 해외에서 크게 호평받은 바 있다. 신상옥 작품의 주연은 두편 모두 신성일이었고, 이두용 작품의 주연은 안성기였다.
곽일로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무명배우들을 기용한 <백의천사와 꼽추>. 척추장애인 청년(지난호에 ‘벙어리’라는 표현을 썼다가 한 장애인시민단체의 간사님께 따끔한 질책을 들었다- 벙어리 대신 언어장애인, 꼽추 대신 척추장애인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다)과 간호사의 애절한 사랑을 다룬 영화다. 이후 그는 불혹의 나이에 감행한 늦깎이 데뷔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맹렬한 작품활동을 펼쳐 198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00편에 육박하는 시나리오를 남겼다. <임자없는 나루배>는 일제하 무성영화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원작에서 나운규가 맡았던 역을 물려받은 배우는 서민적 성격파배우의 최고로 손꼽히던 김승호였다. 곽일로의 초기작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김승호의 출연빈도가 잦다. <언니는 말괄량이>에서 시집간 딸 엄앵란을 혼내주는 유도인 아빠도 김승호였고, <번지없는 주막>에서 아내인 도금봉을 위해 다시 범죄세계로 빠져드는 밀수꾼도 김승호였다.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홀아버지의 이야기 <아빠의 청춘>은 곽일로와 김승호 모두에게 대표작으로 꼽힌다.
임권택의 <남자는 안팔려>는 구봉서와 이대협을 기용한 코미디인데, 여성국극단에 숨어든 여장남 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빌리 와일더의 걸작 <뜨거운 것이 좋아>를 연상시키는 작품. 신상옥과의 첫 작품인 <마적>은 일본헌병대의 군용열차에 실려 압송되던 독립투사들을 구출하는 내용의 전형적인 만주물. 이후 곽일로는 1973년까지 6년 동안 신상옥 감독과 16작품을 함께하는 탄탄한 파트너십을 과시했는데, 그가 남긴 대표작들의 대부분 역시 이 시기에 집중된다. 위에 언급한 <내시>와 짝지워 언급할 만한 작품이 윤정희 주연의 <궁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실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던 한 여인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인데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내시>와 <궁녀>가 일종의 궁중비사라면 <삼일천하>는 꼼꼼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완성된 정통사극. 1884년 개화파청년 김옥균이 주도했던 갑신정변의 진행과정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흥미로운 시선을 끄는 것은 이른바 ‘괴기시대물’이라는 장르다. 사극 혹은 시대물에 미스터리를 바탕에 깔고 호러를 앞에 내세운 독특한 장르인데, 이 역시 신상옥과 함께했을 때 가장 진가를 발휘했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천년호>는 시체스공포영화제에까지 초청되어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장르의 대표작. 연산군시대를 배경으로 고양이를 통하여 환생한 원혼의 연쇄살인극을 다룬 <이조괴담>, 통정(通情)을 통한 천도(薦度)로 처녀귀신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내용을 다룬 <반혼녀> 등이 이 장르에 속한다. 신상옥이 만든 국내 최초의 메이저영화사 신프로덕션이 영업허가를 취소당한 것은 1975년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토록 왕성했던 곽일로의 작품활동도 현저히 감소한다. 유작으로 기록되는 임권택의 <임진란과 계월향>은 왜군대장에게 점령된 평양성을 배경으로 명기인 계월향이 펼치는 애국적 시대활극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9년 강태웅의 <백의천사와 꼽추>
1961년 한형모의 <언니는 말괄량이>, 강찬호의 <번지없는 주막>
1962년 엄심호의 <임자없는 나루배>
1963년 임권택의 <남자는 안팔려>
1964년 장일호의 <아랑의 정조>
1965년 정창화의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6년 정승문의 <아빠의 청춘> ★
1967년 신상옥의 <마적>
1968년 신상옥의 <내시> ★
1969년 신상옥의 <천년호>
1970년 신상옥의 <이조괴담>
1971년 신상옥의 <전쟁과 인간>
1972년 신상옥의 <궁녀>
1973년 신상옥의 <삼일천하> ★, 신상옥의 <반혼녀>
1975년 고영남의 <김두한 제3부>
1977년 임권택의 <임진란과 계월향>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