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제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제일 예쁜 것을 보고 싶은 날이다. 치즈 케이크 한판을 혼자 다 해치워도 용서받을 수 있고, 함박눈이 내려도 출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사치스러운, 가장 비실용적인 선물을 해보자. 이미 어린이가 아니게 된 지 오래지만 죄책감 없이 인형이나 로봇을 살 수 있는 날,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예쁜 그림책 열두권이다.
고양이 님, 크리스마스엔 파티를 열까요?
<고양이 폭풍> 안토니아 바버 글/ 니콜라 베일리 그림/ 비룡소 펴냄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종종 주장한다, 자기들은 고양이의 주인이 아니라 시녀일 뿐이란다. 이 책을 쓴 안토니아 바버 역시 고귀하신 고양이님을 모시는 영광스러운 일족의 한명인 게 틀림없다. <고양이 폭풍>은 영국 콘월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고양이 입장에서 풀어놓는다. 끔찍한 폭풍이 작은 항구를 덮쳐 사람들은 몇주째 고기를 잡지 못하고 굶주린다. 늙은 고양이 마우저를 기르는 늙은 어부 톰은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의 작은 배를 곯릴 수 없어 목숨을 걸고 배를 내기로 결정한다. 마우저는 자기 애완인간을 차마 혼자 보낼 수 없다. 한낱 인간 주제에 폭풍 고양이에 덤비도록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작은 배에 올라 거친 바다로 나선다.
그림책 작가들은 동물들 중에서도 특히 고양이를 즐겨 그린다. 개는 귀엽다면 고양이는 아름답다. 고양이의 요염한 자태와 선명한 눈빛, 호기심 어린 표정이 화가의 탐미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글도 재미있지만 니콜라 베일리의 삽화가 훌륭한데,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힐 만하다. 완벽하게 짜여진 구도이면서 온화함을 잃지 않는 색채가 돋보이며, 자질구레한 소품 하나까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꼼꼼하게 표현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존 버닝햄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존 버닝햄 글·그림/ 시공주니어 펴냄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언제나처럼 일하고 또 일하던 산타클로스와 순록들이 하나씩 쓰러져간다. 초과노동으로 인한 과로에 감기 몸살이 겹친 것이다. 하지만 아프다고 맘 편히 쉴 수 없는 게 산타의 애환이다. 산타는 앓는 순록들을 침대에 눕혀둔 채로 홀로 직업혼을 불사른다. 비행기는 어떨까? 추락해버린다. 지프로 옮겨 타자.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오토바이를 타면? 스키는?
‘순수’미술, 그리고 성인용 상업미술을 하는 작가들은 흔히 어린이책 작업을 얕잡아본다. 하지만 모르는 말씀,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들 중에는 훌륭한 작가들이 무척 많다. 놀랄 만큼 많다. 하지만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생각보다 적다. 존 버닝햄은 글과 그림 모두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는 배 아픈 존재다(심지어 부인도 훌륭한 작가다). 크레용, 목탄, 먹, 수채물감, 파스텔 등 온갖 재료로 다양한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림도 훌륭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을 정확한 타이밍으로 펼쳐놓는 정교한 글이 더욱 만족스럽다. 이 책은 어린이의 상상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버닝햄의 작품 중 최고는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따뜻한 책이다.
산골 소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최고로 멋진 크리스마스 트리> 글로리아 휴스턴 글/ 바버러 쿠니 그림/ 베틀북(프뢰벨) 펴냄
산골 소녀 루시는 이른 봄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아빠와 함께 최고의 트리 감을 일찌감치 점찍어 리본까지 묶어둔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 아빠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군대로 끌려간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루시의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소녀의 안타까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산골의 사계는 아름답기만 하다.
바버러 쿠니는 1917년생으로 현대 어린이책의 초창기부터 활동한 관록있는 작가지만 90년대에도 여전히 작품을 발표하며 현역으로 일하는 정력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가로도 꼽히는 그녀가 애정을 갖고 표현하는 것은 이름 없는 들꽃이나 어린 소녀의 무명 드레스, 수레에 실린 우유병같이 아주 작은 것들이다. 포크 아트, 특히 이름 없는 주부들이 만든 퀼트나 스텐실, 자수 작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그리고 사소한 일상을 온화하게 그려내면서도 또한 강인한 내면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쿠니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요커의 재치가 살아있는 그림책
<멍멍 컹컹 산타 월월 클로스> 샌디 터너 글·그림/ 교학사 펴냄
이 책의 원제는 ‘Silent Night’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그런데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한다. 멍멍 왈왈 으르렁 깨갱깽, 온 집안을 누비며 시끄럽게 굴다가 호되게 야단맞고 조용해진 것도 잠깐. 다시 동네가 떠나가라 짖고 또 짖은 것은 사실 긴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수상한 남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구들을 지키려는 개의 충직함은 칭찬받기는커녕 혼이 날 뿐이다. 결국 개는 지쳐 잠이 들어버리고 아침이 와도 씩씩거리며 코를 곤다. 그리고 신이 나서 선물을 풀어보던 아이들은 못 보던 빨간 헝겊 조각을 발견한다.
글과 그림을 모두 해치운 샌디 터너의 경력은 그림책이 아닌 잡지 뉴요커의 삽화가로 출발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어린이책과는 다르다. 세련되고 독창적이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며,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책에는 한마디도, 단 한마디도 텍스트가 없다. 그렇다고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개 짖는 소리로만 일관할 뿐이다. 만화와 비슷한 장면 분할 속에 축소와 확대가 반복되며 자유롭게 이동하는 구도 속에서 독자는 어느덧 개의 입장이 되어 도대체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같이 짖고 싶어진다.
작아서 더 예쁜, 커서 더 예쁜 그림책
<The Christmas Bear> Henrietta Stickland & Paul Stickland, Dutton Books
쓸쓸한 북극에 웬만한 고양이보다 더 호기심이 많은 하얀 곰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추운 날,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며 취미생활을 즐기던 중 한눈을 팔아 구덩이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떼굴떼굴 한참 굴러가다 도착한 곳은 한창 크리스마스 준비에 바쁜 산타클로스의 작업장이었다. 북극곰은 물을 만났다! 평소 취미이자 특기를 살려 이리저리 참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곰은 선물까지 챙겨서 집으로 돌아간다.
크리스마스라면 역시 이런 행복하고 귀여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이 책의 백미는 자세하게 묘사된 산타 공방의 각종 장난감들이다. 직접 가진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림으로 구경만 하기에도 충분히 즐겁다. 이 책은 다양한 판형으로 나와 있는데, 너비가 30cm가 넘는 큼지막한 페이퍼백은 커서 예쁘고, 인형놀이에 써도 좋을 법한 작은 크기의 하드커버는 작아서 예쁘다.
돌려서 묶으면 ‘원더랜드’가 나온다
<My Fairy Winter Wonderland> Maggie Bateson, Macmillan Children’s Books
캐러셀 형식이란 팝업의 한 장르로, 책장을 끝까지 펼친 뒤 돌려 묶는 방식을 말한다. 장마다 팝업이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해적선이나 성이나 궁전이 그야말로 입체로 펼쳐지는 것이다. 매기 베이트슨과 루이즈 콤포트는 2001년부터 맥밀런 출판사의 베스트셀러 팝업 시리즈를 내놓고 있는 인기 콤비다. 이 책은 <My Fairy Garden> <My Fairy Princess Palace>에 이은 요정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이 시리즈는 한마디로 말해 인형의 집이다. 접으면 평범한 책이지만 펼치면 곧장 집이 된다는 점에서 보통 인형의 집보다 더 멋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요정들은 떡갈나무 할아버지의 파티에 초대받는다. 스케이트, 눈싸움, 발레 공연 등 즐거운 일들로 가득할 겨울 나라를 그리며 요정들은 분주히 짐을 꾸린다. 책을 펼쳐 돌려 묶으면 화려한 겨울 눈 궁전이다. 눈썰매장, 정원, 극장, 놀이방의 네개의 공간이 있는데 튼튼한 계단과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고, 방마다 가구에 책에, 극장 커튼은 진짜 헝겊으로 되어 있다. 물론 종이인형도 딸려 있다. 딸이나 조카 선물로 샀다가도 은근슬쩍 자기 걸로 챙기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