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겨레21>에 ‘남편감을 구한다’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구인 광고 형식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서른 넘은 싱글 여성을 ‘발정난 암캐’ 취급하는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이판사판 덤볐다. 그랬다가 나만 다쳤다. 지금도 교도소나 해병대에서 ‘그렇다면 내가 상대해 주지’ 식의 편지를 받고 있으니 정신적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면 나도 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에 나오는 헬렌처럼 좀더 고상한 부류들을 자극할 수 있는 구인 광고를 내야했는지도 모른다. 갤러리 부관장으로 일하는 이 세련된 뉴요커는 릴케의 시구를 인용한다.
‘새로운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 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공교롭게도 여자가 여자 애인을 구하는 광고였다. 헬렌은 '스트레이트'지만 뭔가 다른 경험을 찾기 위해 그 광고를 냈고, 제 짝을 찾지 못해 엄마의 잔소리에 늘 시달리는 신세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자신의 교양과 지성을 받아줄 만한 상대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뉴욕 트리뷴>의 기자 제시카가 그 광고에 끌렸다.
남녀 관계 일색인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를 비틀고, 동시에 심각하기 짝이 없는 동성애 영화를 유머러스하게 풀었다는 점에서 더욱 즐겁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릴케의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 좋은데 낯 간지럽게 릴케의 시를 인용한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 M. 릴케의 <형상 시집>, ‘고독’ 중에서
장정일은 젊은이들이 시를 읽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저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과 교양인의 대열에 끼어 면피나 했다는 포만감만 남을 뿐이다.” 라는 게 장정일의 '생각'(<생각>이라는 단상집에서)이었다. 과연 그런 것일까? 그런데 왜 어떤 젊은이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공책 제일 앞 장에 릴케의 글(예를 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 같은 글귀)을 적고, 왜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관조의 나이에 든 노장들은 여전히 예이츠의 시를 읽을까?
어쩌면 클린트 이스투우드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예이츠의 시를 인용한 건 장정일 생각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평범한 시골 아낙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도는 사진가 사이를 연결시켜 줄 특별한 코드가 필요했을 것이고, 감독은 또한 그들의 통정이 보다 숭고해 보이길 바랐을 거다. 게다가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중년의 여자도 아직 예이츠의 시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가 예이츠 애호가라면 ‘생애 단 한 번 찾아오는 확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또 다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예이츠의 시 ‘호수의 섬 이니스프리'를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읽어준 건 확실히 희망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희망 없이 누워있는 자들에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자만이 나누어줄 수 있는 작은 불씨 말이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 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 예이츠 '호수의 섬 이니스프리' 중에서
좋은 시는 지상의 지친 이들을 위무한다. 그리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며 자주 잊어버리곤 하는 사물들의 모습과 삶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해준다. 토인비가 장 콕토와의 인터뷰에서 시를 '갱도(坑道) 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한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릴케의 시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2월 29일이, 찾아온 친구를 위해 릴케가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결국 패혈증인지 백혈병인지로 죽었다는 바로 그 날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묘비명을 인용하지는 않겠다. 대신 끝으로 그의 기일을 맞아 릴케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썼다는 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오라, 그대, 내가 인정하는 마지막 존재여, 육체의 조직 속에 깃든 고칠 수 없는 고통아. 정신의 열기로 타올랐듯이, 보라, 나는 타오른다 그대 속에서. 장작은 그대 넘실거리는 불꽃을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나 그대를 키우고, 나는 그대 속에서 타오른다. - 릴케의 마지막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