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혼례 촬영 실습 - 오늘만은 전문 결혼식 촬영기사처럼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술렁이지만, 로렌스만큼은 예외다. 카메라를 든 그는 좀처럼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필리핀 출신으로 한국에서 돌침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그에게 “한국 오기 전엔 무슨 일을 했느냐”는 등 몇 가지 잡다한 질문을 늘어놓자 더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나 홀로 카메라를 든 첫 촬영이기 때문에 신중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무례한 접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어쨌든 첫 대면에도 서툰 한국말로 이런저런 사연을 털어놓는 다른 친구들과는 좀 딴판이다. 뻘쭘해져 있는데,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황보성진씨가 다가와 로렌스에게 “너무 자기 친구들 위주로만 찍는 거 아냐?”라고 핀잔을 날린다.
대답 대신 신랑, 신부의 운당 앞 행진을 놓칠세라 부리나케 뛰어가는 로렌스. 둘러보니, 로렌스만 카메라를 든 게 아니다. “2명은 강의를 들은 친구들이고, 저기 1명은 그들의 친구인데 집에서 8mm 개인 카메라를 들고 따라왔어요.” 황보성진씨는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놀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은 안 해도 흐뭇한 눈치다. “처음에는 카메라 고장나면 큰 일이라고 다들 만지는 것조차 꺼려했거든요.” 카메라 앞에서 그들이 보인 두려움의 기원을 곰곰이 생각하니 기분이 좀 찜찜하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기계가 한번씩 멈춰설 때마다 갖은 욕설과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던 기억들이 쌓여 조그만 카메라조차도 ‘무서운 기계’라고 여겼을 그들을 떠올리니.
그러던 이주노동자들이 카메라를 들기까지는, 돌이켜보면 탈도 많았다. 파키스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워크숍은 그야말로 사고의 연속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오케이’를 연발하던 이들은 막상 수업이 시작되는 날에 시위라도 하듯 말끔한 옷을 입고 나타나더니 갖가지 불만을 늘어놨다. 식사 때 나온 돼지고기 때문에 빈정이 상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고집 센 이슬람인들은 “조를 나눠서 진행하는 것도 싫다”며 처음부터 보이콧 의사를 밝혔다. 결국, 카메라 작동법에 관한 이론 수업 대신 종촬소 내 체험관 견학으로 대신해야 했고, 강사진은 카메라만 들려준 채 “찍고 싶은 대로 찍으세요”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필리핀, 라이베리아 등 국가별로 4차례 진행된 워크숍이 매번 그 모양은 아니었다. 첫술은 배부르기엔 지나치게 부족했지만, 횟수를 더해갈수록 포만에 대한 기대 또한 점점 늘어갔다. 2번째 워크숍을 진행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경우, 마이크를 쥐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꽤 진솔한 인터뷰 형식의 영상편지를 만들어냈고, 필리핀과 라이베리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함께한 4번째 워크숍 때는 빈 의자 기법을 통한 심리치료까지 나아갔다. 카메라와 모니터를 활용해 빈 공간에서 고백성사를 하는 듯한 이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제한시간 10분을 넘기는 사람들도 많았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편집 작업 교육 - 야학으로 배우는 편집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다시 종촬소를 찾았다. 영상지원관 멀티강의실에서 밤 9시부터 4, 5명의 이주노동자들이 편집 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입구 문이 닫혀 있어 영진위쪽 담당자인 김영구씨에게 연락을 했더니 문을 열어주긴 하는데 미안한 얼굴이다. “아직 한분밖에 안 오셨는데 어떡하죠.” 오기로 했던 이들 중 한명은 이사를 하는 중이고, 한명은 여자친구가 토라져서 달래러 갔고, 한명은 아직 야근 중이란다. 지난번 결혼식 때 잠깐 봤던 로렌스만 샤워를 했는지 말끔한 얼굴로 맨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로렌스가 반가우면서도 수강생이 혼자라는 사실이 멋쩍어선지 황보성진씨는 “결혼도 안 한 남자가 그렇게 큰 반지를 끼고 다니면 누가 따르겠느냐”고 로렌스에게 괜한 면박이다.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을 진행하면서 가장 애를 먹은 것 중 하나가 수업시간 확보다. 평일에는 야근이 이어지는 터라 충분한 시간이 없다. 대개 저녁 7시 정도면 하루 일이 끝나지만, 대개는 남아서 잔업을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영상교육을 진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은 휴일인 일요일밖에 없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이슬람권 국가 노동자들의 경우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필리핀 노동자들의 경우 교회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일요일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로렌스가 일찌감치 제 시간에 도착한 이유도 내일은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교육 시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려고 강사진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집단 예배를 드린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 로렌스 얼었나봐.” 평소보다 말수가 더 없는 로렌스를 보고서 이은희씨가 한마디 한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셋이요, 학생은 달랑 한명이다. 보조강사인 이상욱씨와 이은희씨는 잠시 물러서고, 황보성진씨가 로렌스에게 바짝 붙어 개인교습을 시작한다. “컴퓨터는 어디까지 알아요?”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를 사용하려면 기본적인 컴퓨터 지식이 필요한 탓에 황보성진씨는 이것저것 묻는다. 그러더니 1주일 전 결혼식 때 로렌스가 직접 촬영한 카메라를 들고 와서는 컴퓨터에 촬영분량을 다운로드하는 방법부터 일러준다. “잘 찍은 건 두고, 못 찍은 건 잘라내는” 것이 편집이라지만, 경험없는 초보자에게는 골라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 결국 황보성진씨는 일일이 촬영 장면을 짚어주면서 “흔들리는 장면을 살려두면 안 좋겠죠?”, “이건 비슷한 장면인데 너무 길죠?”라고 덧붙인다.
30분쯤 지났을까. 로렌스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선생님을 밀어낸다. 그리고는 촬영 때처럼 이번에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그는 이후 2시간 넘게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편집하는 데만 정신을 팔았다). 간혹 결혼식에서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던 친구들의 장난을 볼 때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 장면은 왜 저렇게 길게 찍은 거야.” 헤드폰을 끼고서 편집 삼매경에 빠진 로렌스 뒤로 몰래 가서 보니, 이은희씨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카메라가 특정 인물 곁을 떠날 줄 모른다. 결혼식날, 방글라데시 신부의 들러리를 섰던 시마라는 이름의 여인. 행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혼자서 춥다며 한복을 벗고 외투를 껴입는 등의 행동으로 눈총을 받았던 시마지만, 외로운 로렌스에겐 더없이 매력적인 이성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11시가 다 된 시각, 잠시 보이지 않았던 김영구씨가 두명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등장한다. “벌써 모션까지 한다고?” 야근을 마치고 곧장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모누(27)는 독학으로 배우고 있는 편집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과 자랑을 내놓은 모양이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한국에 왔다는 모누는 강사진이 인정하는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다. 1박2일로 편집 강의가 늘어난 것도 모누가 졸라서 그렇게 됐다. 얼마 전엔 중고 컴퓨터까지 사서 좁은 집에 들여놨을 정도다. 오늘은 같은 가구 공단에서 일하면서 의형제를 맺은 아잣까지 데려왔다. 아잣의 나이가 22살. 모누가 한국에 처음 왔던 때도 22살이었다. 카메라를 제대로 만져본 적 없는 문외한인 아잣을 모누가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범생이라서 다르긴 다르다. 모누는 연습장까지 빼놓고서 이상욱씨의 이야기를 받아적는다. 질문은 또 어찌나 많은지. 기본적인 지식은 충분하지만, 집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버전이 달라서 새로 배워야 하는데도 지루한 기색 하나 없다. 아무래도 한국말이나 컴퓨터에 익숙지 않은 아잣에겐 벅찰 것 같은지 모누는 중간에 모국어로 통역까지 해준다. 틈을 봐서 모누에게 본인이 만든 영상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냈느냐고 했더니 “보낸다고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안 보냈어요”라고 대답한다. “촬영하면서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거냐고 서로 묻는 게 있었는데. 대답은 안 들어도 다 알거든요. 나랑 똑같은 처지일 테니까. 어쨌든 그 대답 듣는데 찡하던데요”, “도망다니지 않고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모누는 다음에는 기회가 되면 마석 가구공단 바깥의 한국을 찍어보고 싶다. 편집 과정을 듣는 것도 단지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는 아니란다.
어느샌가 김영구씨도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편집 과외를 받고 있다. “영진위 들어와서 신입 때 워크숍에 갔다가 이틀 동안 한숨 안 자고 편집에 빠진 적 있다”는 김씨는 내년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해볼 계획이다. “종촬소를 찾는 분들 중에 동남아시아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런데 따로 가이드가 없다 보니까 그냥 둘러보고 말거든요. 그분들의 언어로 종촬소를 소개하면 더 좋겠다 싶어서, 내년부터서는 가이드를 모집해서 교육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이주노동자들한테도 꽤 괜찮은 아르바이트가 될 것 같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됐다. 마석 가구공단에서 킹카로 소문난 마이클(27)은 여자친구 달래기에 실패한 듯하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나 올 수 있겠다고 연락해온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