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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거부하는 치밀한 아름다움, 나카하라 슌 [1]

지난해 일본영화제에서 ‘보고 싶은 일본영화’를 꼽는 설문조사를 했다. 의외로 많은 표를 받은 것은 나카하라 슌의 <벚꽃 동산>. 봄날의 햇살처럼 화사한 여고생들이,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통해, 소녀들의 몸과 마음을 충일하게 보여준 영화다. <벚꽃 동산>은 올해 일본영화제에 소개돼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문학과 연극의 기운을 영화로 빨아들여 만들어낸 정밀한 드라마에 많은 관객이 공감한 것이다. 사실 <러브 레터>에 열광했던 한국 관객이 가장 좋아할 만한 영화가 또한 <벚꽃 동산>일 게다. 하지만 나카하라 슌은 누구일까? 80년대를 대표하는 신인감독 중 하나이지만, 정식 개봉은커녕 국내의 수많은 영화제에서도 거의 볼 기회가 없었던 나카하라 슌의 영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벚꽃 동산>이 나카하라 슌의 대표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20년이 넘게 추구해온 세계는 또 무엇일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에서 막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나카하라 슌을 만났다.

나카하라 슌은 일본의 넉살 좋은 아저씨상이다. 아담한 몸집에 둥근 얼굴,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농담은 물론 음담도 곧잘 할 것 같은 중년의 아저씨. 섬세하고, 대단히 치밀하게 직조된 <벚꽃 동산>을 만든 감독의 인상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러브 레터>의 이와이 슌지처럼,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생긴 감독 정도는 되어야 ‘소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이외에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니, 산보와 목욕이란다. 영락없는 중년 아저씨, 잘 봐주면 할 일 없는 철학자의 취미다. 그뿐이 아니다. 나카하라 슌은 매번 능글맞게 대화의 핵심에서 빠져나간다. 왜 그 영화를 만들었나, 하고 싶은 말은? 등의 의례적인 질문에는 절대 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슬쩍 비껴나, 그냥 좋아서, 메시지 같은 건 없다, 는 정도의 답으로 눙친다. 곤혹스러운 만남이다. 결국 자기가 어떤 영화를 만드는가보다는, ‘타인이 어떤 영화로 봐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는 나카하라 슌의 답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가 보는 나카하라 슌은 어떤 감독인가, 를 찾기로 한 것이다.

로망 포르노로 데뷔해 말끔한 상업영화의 세계로

나라하라 슌은 전통적인 일본 영화 시스템을, 마지막으로 거친 감독이다. 1951년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난 나카하라는 대학 졸업 뒤 영화사 니카츠에 들어간다. 다른 기업에도 원서를 냈지만 다 떨어졌고,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을 하자’란 마음으로 영화사에 지원한 것이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이 더욱 좋았지만 이미 ‘운명’은 시작됐다. 나라하라 슌은 일본의 전통적인 영화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 조감독부터 출발해 로망 포르노 감독으로 데뷔하는 80년대의 전형적인 절차를 밟아 영화감독이 된 것이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요모타 이누히코는 <일본영화의 이해>에서 80년대를 대표하는 신인감독으로 <태풍 클럽>의 소마이 신지와 <장례식>의 이타미 주조에 이어 <가족게임>의 모리타 요시미쓰, <불 축제>의 야나기미치 미쓰오, <오렌지로드 급행>의 오모리 가즈키, <벚꽃 동산>의 나카하라 슌을 꼽았다. 요절한 소마이 신지와 이타미 주조 그리고 예술영화로 일관한 야나기미치 미쓰오와 달리 모리타 요시미쓰와 오모리 가즈키는 상업영화로 방향을 틀어 성공을 거두었다. 고지라 시리즈를 만들었던 오모리 가즈키의 변신도 놀랍지만, <실락원> 이후 <검은 집> <모방범> 등 자신의 스타일을 상업영화에 결합해 특이한 대작을 만들어내는 모리타 요시미쓰의 활약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벚꽃동산>

그렇다면 나카하라 슌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 예술영화? 상업영화? 사실 나카하라 슌은 그런 구분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감독이다. 70, 8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의 다수가 로망 포르노나 핑크 영화로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일본영화의 산업적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돈을 적게 들이고 일정 관객이 확보되는 장르로의 전환은 필요한 일이었다. 기성 감독들은 품위가 떨어지는 로망 포르노를 찍는 일을 외면했지만, 젊은 영화인들은 기꺼이 감독이 되는 길을 원했다. 나카하라의 말처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애 장면이 얼마 이상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은 있었지만, 그 외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수오 마사유키나 구로사와 기요시 등 재기 넘치는 젊은 감독들이 기꺼이 ‘에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나카하라도 마찬가지다. 나카하라의 데뷔작은 <범해진 지원>(1982)이고, 그 해에만 3편의 로망 포르노를 만들었다. 로망 포르노를 ‘좋아했기 때문에’ 거부감은 없었고, 나카하라 역시 영화를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나카하라의 스타일은 이 시절부터 드러난다. 도시에 사는 커리어우먼의 성적인 일상을 그린 <범해진 지원>은, 전형적인 로망 포르노임에도 관능적인 장면이 매우 부드럽고 리얼하게 그려낸다.

10여편의 로망 포르노를 만든 나카하라 슌은 일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86년에 연출한 <내 여자에게서 손을 떼라>는 아이돌 스타인 교이즈미 교코가 주연을 맡은 범죄영화다. 불량소녀가 우연히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가고, 유괴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샤코탄 부기>(1987)는 간사이 지방의 중소도시를 배경으로, 자동차와 여자에 푹 빠진 소년들의 다사다난한 일상을 그린 청춘극이다. 두편의 영화가 다분히 상업적인 시도로 제작된 영화라면, 문학작품을 각색한 <메이크 업>(1987)은 나카하라 슌의 취향이 잘 드러난 영화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스트리퍼와 정신지체 소년의 순애와 교류를 그린 <메이크 업>은 안개나 비 그리고 밤 장면 등 주변의 정경을 통해 인물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적요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고양이처럼>(1988)은 시스터 콤플렉스가 있는 자매의 일상과 애정관계를 그린 멜로드라마다. ‘내 영화는 러브 스토리, 에로틱한 영화, 코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벚꽃 동산> 이전까지의 필모그래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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