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쉬우며, 쉽게 말할 수 없는 건 진리가 아니다.
예수는 군중 앞에서 늘 비유(어느 시대나 인민들이 삶의 지혜를 나누는 방법인)로 연설했다. 비유로 전달하는 예수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었지만, 대단한 학식을 가진 엘리트보다는 오히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랭이에게 더 충실하게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진리를 가장 쉬운 말로 전함으로써 남다른 지적 능력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엘리트들의 특권 의식을 박탈했다. 세상의 바닥에서 솟아오른 예수의 진리는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 그가 죽은 지 300여년이 지날 무렵 그를 죽인 로마제국을 정복했다.
오늘 한국에서 진리는 여전히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자,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달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생각은 대개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에 기인하지만, 이른바 좌파 영역에선 ‘80년대 지식인들의 독특한 청산’과 관련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일군의 80년대 좌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역사의 최종적인 실패라 규정했다. 이어 그들은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모자란 이해를 진리 자체의 모자람이라 규정하고 다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섰다. 그 이름도 난해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보다 더 난해한 이론들이 새로운 진리로 채택되었다.
물론, 그 난해한 이론들은 (모든 공인된 이론들이 그러하듯) 나름의 통찰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유난히 난해하다는 점만으로도 80년대 좌파들이 일제히 청산하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한국의 정신 상황엔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인민들의 정신적 근대성이 한국 지식인 평균을 상회하는 프랑스에서조차 난해하게 여겨지는 그 난해한 이론들 말이다. 게다가 싱거운 일은 그 이론들이 한국 현실에서 갖는 의미란 굳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그런 난해한 이론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이 점에 대해선 그 이론을 전파한 당사자들의 인터뷰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이른바 허무개그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쉽게 전달하긴커녕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최대한 알아먹기 어렵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듯한 지식인들의 희한한 행태는 실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책을 통해, 모종의 특별한 지적 훈련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이다. 그들은 실제 삶보다 책이라는 간접적 삶에 더 익숙하고 책 속의 난해한 개념어들(지식인들끼리의 학술적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임시어. 지식인들은 바로 이 개념어를 마구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에게서 그들의 지적 권위를 확보하곤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인문주의적 개념어를 인문주의 정신의 증거라 주장한다)은 그들에겐 당연히 편리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진리란 진리의 재료인 삶이 빠져 있기에 십중팔구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에 머물곤 한다(그들이 끊임없이 진리를 청산하고 재도입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진리라 여기는 것’이 언제나 ‘가장 어렵게 표현된 무지’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는 인민들이 진리를 얻는 일(인민들이 세상의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 일)을 차단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욕망과 결합하여 강고한 지적 권위주의를 형성한다.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인들의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하고 일반적인 방법이라 주장되며, 진리는 지식인들의 이런저런 마스터베이션이나 변태적 놀음의 재료로 추락하고, 급기야 인민들은 진리에 접근하는 자신의 능력을 아예 잊고 살게 된다. 결국 자본과 권력은 지식인들의 품위유지를 보장하는 수고만으로 자신들의 낙원을 힘차게 일구어 간다.
추신: 하방(下放)을 기억한다. 하방은 중국에서 1942년 마오쩌둥의 연안문예강화 이후 바로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를 뜯어고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상산하향(上山下鄕), 말하자면 산간벽지와 북방의 광활한 황무지에 보내 노동하게 한 일이다. 오늘 한국에서, 우리는 하방을 기억한다.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