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생명윤리 논란에 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읽어보니 거기라고 뭐 특별히 새로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기사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조국을 위한 난자들.” 물론 한국에서 일고 있는 애국적 난자기증운동의 성격을 집약한 표현이다.
난자 기증을 받는 황 박사의 팬 카페. 대문에는 황우석 박사가 스너피를 안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사진의 주위에는 수백 송이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난자 기증 여성이 나타날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늘어난다고 한다. “황우석 교수님 우리가 정성껏 가꿔놓은 무궁화 꽃밭 사이로 귀여운 스너피 데리고 빨리 돌아오세요.”
“하늘 아래 최고로 성스러운 곳”이라고 하는 그곳에서는 애국심이 마침내 종교적 신성함에 이르러, 난자를 기증한 여인들을 “성녀”라 부르고 있었다. 게시판 윗부분에 공지 사항으로 걸려 있는 어느 신문의 기사가 성녀가 되려고 하는 여성들의 결단을 도와주고 있었다. “난자 채취할 때 별로 아프지 않아요.”
의학의 발전을 위해 신체를 기증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거기에는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즉, 신체의 기증은 애국적 분노가 아니라 인간적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수백명의 “성녀”들 중에는 애국심이 아니라 인간애에서 기증을 약속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증된 난자가 왜 ‘무궁화 꽃’으로 상징되어야 할까?
과학의 발전을 위해 제 몸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거룩하고 성스러우려면, 의료산업이 벌어들일 화폐가치가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게시판에서는 “33조”라는 구체적 액수에 대한 기대와 연구의 차질로 빚어질 손실에 대한 우려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난자의 기증은 거기에 따르는 고통과 위험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내려지는 힘겨운 결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자기증운동을 벌이는 모임의 한 관계자는 <YTN>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난자 채취에 따르는 위험을 끝내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그저 기증자들은 자신들이 위탁한 전문가들로부터 그 위험성에 관해 충분한 정보를 받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한국 여성의 난자가 일본으로 팔려가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사회를 시끄럽게 할 때만 해도, 매스컴은 난자 채취에 얼마나 위험이 따르는지 강조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황우석 박사가 문제가 되자, 갑자기 이 내용의 기사가 올라와 인터넷을 떠돌다가 드디어 팬 카페의 대문에 걸렸다. “아프지 않아요. 주사가 조금 따끔하고 가벼운 감기를 앓는 정도뿐이에요.”
난자를 기증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남성들의 사연도 올라와 있었다. 여성의 몸을 성스러운 조국의 제단에 바친 남성들. 정말로 생명의 귀중함 때문이라면, 자신들도 하다못해 사후 장기기증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황우석 박사가 휠체어 탄 이를 걷게 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지만, 장기기증은 지금의 기술로도 당장 수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