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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지만 강단있는 느낌의 비밀, <나의 결혼원정기>의 수애

가장 이상한 건 장만옥과 주성치라는 두 이름의 조합이었다. 수애가 데뷔 때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배우로 어김없이 지명하는 두 이름의 대비는 아무래도 기이하다. 장만옥과 양조위라든가, 주성치와 여명이라든가 했다면 새삼스럽진 않아도 낯설지는 않을 텐데. 장만옥과 주성치 사이에는 뾰족히 떠오르는 게 없다. 홍콩이란 단어 말고는. 세트로 묶어 언급해온 건 아니다. 보고 있으면 편안해지므로 주성치를 좋아하고,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전체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원숙함 때문에 장만옥을 첫손에 꼽아왔다. 이번 인터뷰에도 두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임의로 궁금증을 풀었다.

스펀지로 만든 거대한 벽과 씨름해야 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부딪혀도 아프지는 않지만 시원할 것도 없는 게임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랄까. 수애는 말을 아낀다, 는 ‘충고’를 들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그에 관한 예전 인터뷰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수애의 간략한 답은 어떤 전략이거나 하얀 진심의 발로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어느 쪽이어도 난감할 것 같았다.

값비싼 무채색의 압구정 거리에 알록달록한 원색의 무늬로 자신을 툭 드러낸 카페로 그가 나타났다. 카메라 앞에 서자마자 조그맣고 분명하게 묻는다. “촬영 컨셉이 어떻게 되나요?” 잘됐다 싶었다. 촬영이 끝나고 테이블에 녹음기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인터뷰 컨셉은 당신의 단아한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오는가입니다.” 그날 눈으로도 확인했지만 현실의 그녀는 차분하고 조용하며 수줍다. 웃음이 얹히면 순한 기미까지 얹힌다. 그 얼굴이 스크린에 투사되면 달라진다. <가족>의 소매치기 4범에 살인혐의까지 받는 정은이나 <나의 결혼원정기>의 탈북 처녀 라라는 강단있고 생활력 넘치는 단단한 여성이다. 야무지게 힘을 발산하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팍팍하지 않은 건 차분하고 조용한 그 무언가가 받쳐주기 때문이라고 풀이해봤다. 사실, <가족>에서 감정의 흐름을 원활하게 갈무리해가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문제적 반항아로 선선히 받아들이기에 약간의 걸림돌이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깨끗한 얼굴이었다. <나의 결혼원정기>에선 농촌 노총각 만택(정재영)이 좋아하는 시선대로 라라를 사랑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또 남한 노총각을 사랑하게 됐지만 그 애정을 표현할 수 없는, 행동할 수 없는 라라의 슬픔에 더불어 쉽게 몸을 실을 수 있다. ‘단아한 카리스마’가 캐릭터와 스토리에 더욱 밀착해 들어갔다고 할까.

-침착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이 영화의 캐릭터들과 많이 다른데 어떻게 파고들어가죠?

=저도 <가족> 보면서 저게 내가 맞나 싶었어요. 그런 내 모습이 어색했어요. 라라는 정은보다 캐릭터적으로 쉬울 수 있었는데 더 어려웠어요. 시간적 스케줄도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촬영해야 했으나까 더. 혼자 하는 느낌이…. 초반에는 그런 불안감이 있었어요.

-라라를 분석하면서 정은과 달리 어떤 모습을 더 보여주려고 했죠?

=분석을 체계적으로 못해요. 시나리오를 읽고 오는 느낌대로 하는 거죠. 시나리오를 많이 읽고 그 느낌들을 찾아내려고 해요. 라라는 정은보다 좀더 편하게, 좀더 유한 캐릭터니까 그렇게 연기하자는 정도였어요. 더 자유롭게, 더 편하게,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갔던 것 같아요.

-표현해야 하는 걸 쉽게 표현하지 못하나요? 라라처럼.

=그래요. 그렇지만 얼굴에는 표가 다 나요. 말한 거나 다름없는 것처럼. (웃음)

-사람이든 미래든 무엇에 대해 애틋한 맘을 절실하게 품어본 적이 있나요? 라라처럼.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없는 건가.

-데뷔 전 1년 동안 연기 훈련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나요.

=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게 아니라서, 불안감이 있어서 1년 정도 대본을 읽고 가면 몇몇 선생님들이 단체로 지도해주셨어요.

-그뒤로 많이 달라졌나요.

=똑같았어요. 한두 시간 정도 받았는데 끝나면 빨리빨리 그냥 가고 했어요.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는데 오히려 <베스트극장>이라는 단막극을 하고 나서 어∼ 내가? 이렇게 하네, 하는 느낌이 들었죠.

-실제는 내성적인데 강한 연기를 하는 건 어떻게 가능하죠.

=연기훈련이 저도 모르게 도움이 됐을 거예요. 자신감이나 테크닉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감정을 찾아내는 거.

-황정민, 정재영 같은 배우를 직접 만나보면 예민하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스크린에선 어떤 카리스마가 확 살아나죠. 여자쪽으로 오면 수애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

=내가 그렇게 비쳐지는 게 실감이 안 나요. <나의 결혼원정기>를 네번 봤는데 제 관점을 못 깨겠어요.

-어떤 관점요?

=촬영하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생각나서 객관성을 가지고 영화를 볼 수가 없어요. 주변의 이런저런 상황들과 힘든 기억들. 그래서 라라에게 감정이입이 안 돼요. 네번을 봤는데도 영화를 본 게 아닌 거죠.

-강단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건 어떤가요.

=희망적이지 않나요. (웃음) 바로 이 장면이에요, 라고 말하진 못하지만 라라의 그런 모습은 매력적이죠.

-기쁨 혹은 슬픔을 연기할 때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쪽인가요 아님 그냥 그 사람이 되는 편인가요.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경우예요. 처음에는 슬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운 적이 있는데 모니터를 보니 하나도 슬프지 않은 거예요. 그게 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대본에 집중하게 됐어요. 눈물이 열 방울 나와야 하는데 한 방울만 나와도 이게 오히려 더 잘 맞는다 싶었어요.

-연기할 때 자연인 수애는 잊는다는 거죠?

=네. 기쁜 거나 슬픈 거나. 디테일에선 꼭 그렇지 않지만.

-시나리오에 집중해 그 사람의 상황이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받아들이는 폭이 그만큼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깊은 슬픔, 깊은 고통을 느끼고 나서 자신의 연기가 달라졌다는 이도 있던데.

=3년 반 동안 연기하면서 한번도 쉰 적이 없는데 이번에 쉬는 건 그 때문이에요. 좀더 넓게 보려고요.

-예쁜 여배우인데 예뻐 보이는 캐릭터를 하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닐 텐데.

=그런 것에 초점을 안 맞췄으니까요.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시나리오도 그런 것만 보게 되겠죠.

-왜 그런 것에 끌리죠.

=그게 더 매력적이니까요. 예쁘다든가 공주보다는 탈북녀 라라 같은.

-또 어떤 게 끌리죠.

=마음이 끌리는 거. 탈북녀 라라가 아무리 멋있어도 시나리오가 끌리지 않으면 소용없죠. 다음 작품도 멋있고 예쁘고 그런 것보다 마음이 끌리는 걸 택하게 될 거예요.

-정은과 라라에게 공통점이 있나요.

=확실히 있어요. 심리상태가 비슷한 것 같아요. 쫓기면서도 이겨내야겠다는 마음가짐. 뭔가 많은 걸 바라지 않고 앞의 현실에 있는 걸 지켜가면서…. 욕심이 없는 아이인 것 같아요.

-분석보다는 직감, 직관으로 연기를 대해온 것 같네요.

=네. 지금까지 배운 건 그것밖에 없어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했는데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아직 없어요. 후회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면 연기가 어느 순간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네요.

=그러고 싶어요. 드라마 <회전목마>를 했을 때 바보스런 사람이었고 눈물의 여왕이란 말이 붙어다녔어요. 단아한 카리스마라는 건 <해신>과 영화 두편의 이미지일 텐데, 다음에 액션이나 악녀를 하면 또 다른 게 따라다닐 테니까 그렇게 맘에 두지는 않아요.

-악녀요?

=이유있는 악녀에 관심이 있어요.

그는 그냥 장만옥과 주성치가 아니라 <화양연화>의 장만옥과 <소림축구>의 주성치가 좋다고 했다. <클린>의 장만옥이나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했다. <화양연화>의 장만옥은 <클린>의 장만옥만큼 단단한 카리스마가 느껴지진 않지만 현실의 슬픔에 휘둘리지도 거꾸로 지배하지도 않는, 기품있는 여유를 보여준다. <소림축구>의 주성치는 <쿵푸 허슬>보다 덜 희화적이다. 처량한 신세지만 믿는 바를 밀어붙이고 나누려는 노력이 <희극지왕>의 주성치에 좀더 가깝다. ‘느낌’이란 말을 가장 많이 꺼내놓는, 자신의 직감과 직관을 믿는 배우는 선하게 주눅들지 않는 그들의 눈을 좋아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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