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댕기>라는 잡지에서 만화가 김진이 어두운 고교 시절을 회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버렸다고 마음먹었다 치더라도 그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고, 어느 순간 죽어도 아무 남을 게 없으리라던 외로움들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될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증오도 향수도 풍화된 그 문장에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김진과 그녀의 만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일부러 위안하려고 애쓰지 않음으로써 위로했고, 꽃 속 같이 천진한 영혼들이 기어코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가혹한 성장담을 통해 살아갈 기운을 주었다. 슬픔과 기쁨 사이에 복잡한 표정으로 멈추어선 이야기를 통해 남들이 표현한 감정을 외워 말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것을 엄격히 가르쳐주었다. 언젠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1983년 11월 월간 <여고시대>에 <바다로 간 새>로 데뷔한 김진은 다양한 작품으로 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내성적인 대학생 윤하의 이야기 <별의 초상>(1985)으로 이름을 알렸고 <레모네이드처럼>(1987) <모카커피 마시기>(1988) <SOS 아이 러브 유>(1992)로 이어진 일명 ‘한씨연대기’와 명랑한 카툰 <조그맣고 조그맣고 조그마한 사랑이야기>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방대한 연작 <The Songs>는 총 9부 중 <가브리엘의 숲>(전 6권)과 <1815>(전 14권)만 완성됐으나 김진의 서사적 야심을 가늠케 한 기획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그린 <숲의 이름>은 대한민국 출판만화 대상 저작상을 수상했고 작가의 대표작이 된 서사시 <바람의 나라>(단행본 22권까지 출간)는 고구려와 낙랑의 전장을 지나며 이야기의 3/4 지점에 다다랐다. 1988년 시작한 SF <푸른 포에닉스>도 아직 완결을 향한 항해 중에 있다. 현재 김진은 작가 5인이 연합해 만든 웹사이트 <WE6>에 <바람의 나라>를, 여성만화지 <허브>에 <조우>를 연재 중이다. 여러 번의 휴지기를 거치며 끈질기게 이어지는 김진의 작품은 호흡이 길고 외연이 넓다. 그녀의 작품 중 다수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재출간됐으며 외전도 많다. <바람의 나라>는 게임과 뮤지컬, 작가가 직접 집필한 소설로도 모습을 바꾸기도 했다. 여러 세대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즐겨 쓰는 김진의 만화에서 아버지의 고독과 아들의 몸부림, 어머니의 눈물과 딸의 기도는 끝없이 유전되는 인간의 숙명을 노래하는 하나의 가락으로 어우러지곤 한다. 김진은 바람처럼 변덕스럽고 숲처럼 혼미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처투성이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서늘한 운명을 굿한다. “너를 잃으면 세계를 얻어도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너와 세계를 바꾸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라는 <바람의 나라>의 대무신왕 무휼의 독백은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김진의 시선을 엿보게 한다.
오후 3시. 김진 작가의 역삼동 작업실에 들어서자 공기 중에 미열이 느껴졌다. 그것이 아침에야 끝난 밤샘 작업의 여운임을, 소스라쳐 잠을 깨는 화실 식구들을 보고 알았다. 미안한 마음에 화실의 고양이 금순이를 하릴없이 쓰다듬고 있는 동안, 김진 작가가 인터뷰 채비를 마쳤다. 여리지만 단호한 음성, 상냥하지만 엄격한 눈이 다가왔다.
-오래전 잡지에 학교에서 겪은 정신적 폭력에 대한 글을 쓰신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어른들을 미워하는 10대였나요?
=미워하지는 않았고 그저 “왜 저럴까?” 했지요. 사람 사는 것이 구조적으로 이상한데, 그 구조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고민과 경험은 어릴 때 안 하면 일흔이 넘어서도 꼭 하게 되는 것이 인생인 것 같아요. 저는 남들보다 먼저 겪은 편이죠. 그런데 당시 선생님들보다 내가 더 나이 들고 헤아려보니 그때 그들은 나이에 맞는 행동을 했구나 싶어요. 경험을 통해 많이 깨달으면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분노만 배우면 얇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10대 시절 상상한 미래의 직업은 만화가보다는 소설가가 먼저 아니었나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으니까요.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쓰거나 그리지 않으면 못 견뎠어요. 탈출이었고 본능에 가까웠어요. 유치원 때부터 글과 그림이 편했어요. 할아버지한테 편지 쓰면서 ‘산’이라고 쓰는 대신 그렸던 기억이 나요. 그림이나 글에는 치료효과도 있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시뮬레이션을 해서 돌려보면 이해가 가능할 때도 있고 혹은 극대화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역시 최초로 창작한 장르는 일기일까요?
=일기는 안 썼어요. 누군가 일기를 봤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을 거예요.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남이 내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건 용납이 안 되죠. 그리고 남의 일기처럼 재미없는 게 없어요. <안네의 일기> 재미있었어요? 나는 재미없었어요. 일기란 본디 굉장히 사적이고 편협한 글이잖아요. 일기가 과연 진정한 글인가 의심도 가요. 그렇게 널뛰는 글로 어떤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일기보다 적절한 양식을 부여한 글이 더 유용하다는 뜻인가요?
=솔직하지만 편협한 일기나 남들 보라고 쓰는 일기나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겠죠. 제가 글을 오래 써서인지 글을 보면 사람이 보여요. 자기를 잘 드러내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는 글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잘 속더라고요. ‘후리는 글’은 때로 굉장히 아름답기도 하고 잘 정돈됐는데, 읽다보면 앞뒤의 모든 글이 똑같아요. “나는 착하고 포용력 많은 사람”이라는 투의 글에 오히려 거짓이 많더군요.
-작가인 동시에 독서광이신 걸로 알아요. 언젠가 장례의 방식을 고를 수 있다면 책과 책상을 땔감으로 화장되고 싶다는 말도 하셨죠. 독서 취향은 어느 쪽이세요?
=내가 모은 책 남이 읽는 건 싫으니까, 그런 상상을 했나봐요. 죽어서라도 털어 읽으려고. (웃음) 교과서적으로 100%의 좋은 글은 국문과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만, 저는 저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글을 좋아해요.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즐겨 읽는데 그런 글에서도 어느 순간 저자가 확 드러날 때가 있거든요. 아무리 건조한 척해도 격렬해지는 그 순간을 포착했을 때 멋지다고 느끼죠.
-역사가들의 글이 간혹 그렇지요?
=안 그런 것 같지만 굉장히 격렬하죠. 심지어 <삼국사기>의 김부식조차 들통이 나요. 그러면 성격이 이랬겠군, 내지는 좀 칠칠치 못하다는 생각도 하죠. (웃음) 과학자들도 그런 느낌이 있어요. 이과 계통 저자의 글이 솔직한 글이 많은데, 기승전결만 맞추면 되는 글이 분명한데도 어느 순간 슬쩍 이탈할 때 인간을 보는 기분이 들고 사람을 잡아내는 그 맛이 글 읽는 재미예요.
“그때 대화하고 싶은 상대에게 집중합니다”
-문하생 생활을 한번도 안 하셨죠?
=학교를 다니고 있던 터라 불가능했어요. 정보도 어두웠고 누구한테 배울지도 몰랐고 “왜 배워야 하나?” 하는 방자한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데뷔를 한 뒤 보니 약간의 배움은 필요하더군요. 저처럼 감정의 폭주를 잘하는 사람들은 “거긴 아니야”라고 일러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직접적 스승은 없었지만 김형배 선생님이 데뷔하도록 잡지에 소개해주셨어요. 저를 알아봐주신 분이고 이후로도 이따금 볼 때마다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고마운 분이세요.
-선생님의 일부 작품은 구하기가 힘듭니다. 만화정보센터가 소장한 자료도 완전한 컬렉션은 아니고요. 영화의 프린트 보존 문제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출판사도 없어지고 본인도 갖고 있지 않아 작품의 실체가 사라진 경우 속상하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개인도 아닌 단체가 창립 이전의 자료를 찾아 모으긴 힘들겠죠. 그런데 만화는 10년 이상 지나고 보면 자기 그림을 자기가 인정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슬쩍 없애기도 하죠. 저는 주로 시멘트 쓰레기통에서 태워서 증거를 인멸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어요. (웃음)
-김진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신인 시절부터 이야기의 진도나 사건의 빈도에 대한 조바심을 찾기 힘듭니다. 연재 한회분에 사건의 한 고비를 꼭 넘겨야 한다거나 하는 강박에 초연하게 끌어간다는 느낌입니다.
=원래 연재분 24페이지를 하면 몇 페이지에서 사건 터뜨리고 어디쯤 클라이맥스를 넣어 끝낸다는 식의 공식은 있어요. 그래서 고의적인 구성을 넣기도 하는데, 나중에 책이 나오면 그런 부분이 꼭 전체 흐름에 문제가 돼요. 전쟁신인데 할 수 없이 로맨스를 넣는다든가 하는 식의 발상은 안 해요. 이번에는 이런 감정의 독자들과 대화하고 싶다면 지금 대화하는 상대에게 집중하고 다른 사람과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요. 다행히 데뷔시켜주신 김형배 선생님도, 처음 단행본을 내준 프린스 출판사도 제 작품의 호흡을 이해하셨어요. 보호받은 경우예요. 남모르게 받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같은 맥락일까요? 선생님의 장편은 연재 지면 사정에 따라 기약없이 중단되는 일도 많았는데 얼마나 오래 쉬었는가에 별반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그려나가는 느낌입니다.
=조바심을 내고 작품을 끝내봤는데 결코 좋을 게 없어요. 스포츠지에 연재한 <신들의 황혼>이 그랬는데 실패라기보다 흡족하지 않았죠. 정말로 끝난 작품은 끝나는 순간 인물들까지 훨훨 날아가거든요. 이름조차 희미해지죠. 그러나 끝이 안 나면, 굿이 안 끝나면, 조바심 내봤자 안 끝나요. 천천히 가는 것이 그 작품의 숙명인 거예요.
-<The Songs> 연작은 <1815> 이후로 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 <푸른 포에닉스> <Here>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등 미완성작도 마음속에 이미 그려져 있습니까?
=<The Songs>는 스토리도 다 썼지만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최대한 자료를 연구해 집어넣었지만 외국 이야기다보니 확신이 없고 그 나라에 대한 예의도 있어 함부로 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F인 <푸른 포에닉스>는 제가 만드는 세상이니까 그런 문제가 없어요. <Here>와 <어떤 새…>는 진행 중입니다.
-엄희자, 이혜순 선생님 같은 이른바 순정만화 장르의 선배보다 고우영 선생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장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새소년> <소년중앙> <소년세계> 같은 잡지를 보고 자랐고 거기서 고우영 선생님이 다른 필명으로 그린 <짱구박사>를 좋아했어요. 굉장히 많은 걸 알지만 아는 걸 안다고 말 안 하고 “응, 그냥 그런 게 있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고 선생님의 방식이 참 좋아요.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별것이거든요.
-고우영 선생님은 중국 역사만화를 많이 그리셨는데요.
=그러나 한국사에도 깊은 분이셨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의 <십팔사략>을 보면 신농과 치우가 나오는 대목에서 “저것들은 배달족이야”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건 원래 <십팔사략>에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십팔사략>이라는 의미가 드러나는 부분이죠.
“여자가 더러워지는 것을 몹시 싫어해요”
-선생님은 카툰부터 현대 가족물, 학원물, SF, 시대극 등등 다양한 영역의 작품을 때로는 거의 동시에 작업하시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르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차이인가요? 문체의 차이인가요?
=장르를 왜 나누는지도 모르겠어요. 톨스토이도 그의 우화를 읽은 사람은 그의 소설을 복잡해서 읽기 싫어하죠. 작가가 먼저지 장르가 먼저일 리 없는데 뭔가 전후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이름을 알린 장편 <별의 초상>부터 근작 <바람의 나라>까지 가족은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큰 기둥 중 하나입니다. 가족 지상주의나 가족애의 찬미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인연의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구속력을 거듭 묘사하셨습니다.
=가족이란 사람이 살면서 처음 만나는 집단이니 아무리 큰 스케일의 이야기도 가족을 제외하고 풀 수 없어요. 가족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간 경험에 기저를 제공하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혁명이 일어나도 준비돼 있지 않으면 갑자기 혁명에 동조하진 않죠. 가족, 친구, 주변 역할 모델에서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다가 움직이는 게 정상이라고 봐요.
-역사를 다룬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영화에서 멜로드라마 장르가 가진 것과 유사한 힘을 느낍니다. 어떤 사회적 역사적 문제도 반드시 개인의 감각과 감정을 통해서 표현해낼 때의 힘이랄까요?
=하지만 그 때문에 큰 문제를 작게 만들 수도 있죠. 근데 저는 큰 문제는 크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이야기를 멜로의 부속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호동이가 사랑을 한 것은 멜로에 속하지만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나 사람을 끌어가는 힘은 또 다른 곳에 있다고 봅니다.
-<바람의 나라>에 그려진 전투하는 인간들의 내면 독백에 귀기울여보면 궁극적으로는 민족도 계급도 아닌 실존적인 동기가 가장 중요한데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지으시겠습니까?
=누구나 존재하려면 필요한 목표와 좌표입니다. 그 목표에 깃발이라는 상징적 단어를 사용하죠. 또한, 인간의 좌표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고, 그의 좌표는 다시 다른 사람의 좌표를 정합니다. 사람은 그릇이- 인격의 그릇이 아니라- 모두 다른데 왕 된 자의 그릇은 사랑보다는 다른 판단의 비율이 높고, 다른 사람은 사랑의 비율이 높을 수 있죠. 왕의 결정은 수많은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데, 사랑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 나라와 백성이 어찌되겠습니까?
-선생님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모티브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까발려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니까요. 전쟁을 좋아하진 않아요.
-선생님은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그릴 때 부자 관계나 연애나 우정이나 근본적으로 다르게 그리지 않는다는 인상입니다.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자기가 익숙한 것에 대해 전투를 벌이기가 좀더 쉬운 것 같아요.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것보다 남자와 남자가 싸우는 게 쉽죠. 그것을 두고 제가 부자간의 갈등에 집중한다고 해석하면 약간 과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확실히 어머니나 누이의 경우는 지켜내야만 할 순수, 더럽혀선 안 될 무엇으로 묘사하실 때가 많은데요.
=제가 남녀차별을 조금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전 여자가 더러워지는 것을 몹시 싫어해요. 그래서 여행을 보내도 고급스럽게 보내죠. 왜냐하면 체력적으로 약하고 여자는 아무래도 조금 ‘고급종’에 속하잖아요. (웃음) 정신적인 것 말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는 여자를 막 다루고 싶지 않아요.
-순정만화라는 이름이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걸로 압니다. 여성만화라는 장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정만화란 이름을 임의로 붙여놓고 떼지 못해서 쩔쩔 매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작명은 조심해야 해요. 여성만화도 마음에 안 들어요. 남성만화는 그냥 만화고 여성만화는 굳이 여성만화인가요.
-흔히 한국 여성만화가들의 힘을 여성독자와의 강한 결속에서 찾기도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아무래도 남성작가-남성독자보다 여성작가-여성독자의 유대가 좀더 활성화돼 있긴 해요. 제 독자는 성별을 떠나 주장이 강하고 공격성이 높아요. 작품에 대한 분석에서도 때로는 앞질러가 긴장시킬 때도 있죠. 제 독자들의 편지는 “어떤 오빠가 좋아요” 하는 내용보다 아버지를 어떻게 하고 싶다거나 학교에서 격렬한 상황을 겪었다거나 하는 내용이 많아요. 격한 편지는 답장을 안 하는데 그러면 어느 순간 스스로 해결하는 것 같아요.
-작품에서도 손쉽게 위로하는 결론은 절대 안 내시죠? 중편 <황혼에 지다>를 보면 밝고 모범적인 소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주저없이 그리셨는데요.
=위로는 남한테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용서 안 하면 남이 백날 이야기해도 겉말밖에 안 돼요.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코 사건의 종결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선 좀 가차가 없죠. 사랑이란, 안타깝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별의 초상>의 윤하, <1815>의 사빈, <바람의 나라>의 무휼 등등 모든 사람을 책임지고 돌보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아이의 캐릭터를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캐릭터가 자꾸 나온다는 것은 그 작가에게 풀리지 않는 화두라는 뜻이에요. 굉장히 투쟁적인 여성상이 끝도 없이 나온다면, 그것이 그 작가의 화두라는 거죠. 제 경우는 책임과 성장에 대한 화두가 있는 것이죠. 데생을 할 때도 한 시기에 어느 작가가 그리는 목이 굉장히 굵어진다거나 손이 커질 때가 있어요. 그건 작가가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성장과 책임의 화두가 풀리면 그런 애들이 서서히 제 작품에서 사라질지도 몰라요. 그럼 또 다른 애들이 사고를 치겠죠. (웃음)
“만화도 연출이 있고 카메라 각도가 있어요”
-<바람의 나라>를 처음 보았을 때 역사를 재현한 시대극이라기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상상력, 조건에 호소하는 초국적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보편적인 부분을 이야기해야 수명이 길지요. ‘우리의 역사’를 그렸다는 점은, 한국적인 것에 본디 야심이 있었던 <댕기> 편집부의 청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 가능한 자료를 다 조사하고,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재판 나올 때 보완하는 식으로 작업했어요. 독자의 연구와 지적도 큰 도움이 됐어요.
-주인공들을 수호하며 명운을 같이 하는 주작, 청룡 등 신수의 개념이 매혹적입니다. 이질적인 존재가 어우러져 산 시대를 보면서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신수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느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물의 성격과 그들의 신수 사이에도 치밀한 연관이 있을 듯하고요.
=우리나라의 무속개념은 일본이나 중국과 달라요. 그래서 오방으로 나눈다거나 하는 도식화가 힘들어요. 캐릭터와 신수는 모두 근본적 연관이 있고 보편적인 이론에다 책과는 조금 다르게 보는 저의 해석이 더해져 이해하기가 조금 복잡해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싸우는 중이라, 이런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김진 작가는 <태왕사신기>의 김종학 프로덕션과 <바람의 나라> 도용 문제로 대립 중이다).
-특히 역사물인 <바람의 나라> 같은 경우 선생님이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은 역사가의 작업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적 결과를 두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 여러 인자에 무게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그리는 일이니까요.
=역사가들이 주로 누락하는 부분은 심리적 부분이죠. 역사서는 재야와 강단 할 것 없이 최대한 많이 보고 있어요.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단고기>가 정설이라거나 <삼국사기>가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작가로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수용하고 인간에 대한 제 시선을 선택의 잣대로 써 조율한 뒤 창작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었을까라고 역산하는 것이죠. 작품에서는 물론 주인공 입장이라는 것도 있고 덕분에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이유도 많이 붙여지겠지만, 상대된 입장에서 보는 이쪽의 모습도 과연 그렇겠습니까? 그 부분을 간과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열어서 열린 텍스트를 만들고자 노력하기는 합니다. 작가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든가 하는 말로 일축하기보다는 그 억지스런 대상을 파악하고 이유를 유추해내거나 빠진 아귀를 창작해 맞춰 돌려보는 사람이고, 그것이 역사물을 다루는 매력입니다.
-비단 <바람의 나라> 같은 서사극이 아니어도 선생님의 작품은 영상화를 상상하게 됩니다. 이야기나 스펙터클 때문이 아니라 장면을 그림 칸으로 쪼개는 방식과 배치가 영화의 그림 콘티처럼 세밀하고 역동적이거든요.
=만화도 연출이 있고 카메라 각도가 있거든요. 상상의 카메라를 두고 위에서 볼 거냐 아래서 볼 거냐 옆에서 볼 거냐를 정하죠. 마음속의 카메라니까 좀더 자유롭고 과감하게 하고 싶죠. 머릿속에 카메라를 설치하면 데생이 미흡해도 늘게 돼 있어요. 그리고 싶은 컷을 미숙해도 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간이 그렇다면 시간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독자가 읽는 속도를 통제하시나요?
=일부러 통제하지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도록 글이 이중으로 나가기도 해요. 만화가 영화나 소설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한컷에서 대화가 중첩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상대의 대사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죠. A가 말을 할 때 B가 받아치면서 두 캐릭터의 생각을 옆에 동시에 쓸 수 있고 거기다 비난하는 캐릭터인 C가 저쪽에서 말을 하면서 작가의 내레이션까지 들어가면 여섯개의 이야기가 흐를 수 있죠. 그쯤 되면 굉장한 고급 독서에 속하는데 사람들은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걸 잘 몰라요.
-<바람의 나라>를 통해 게임, 뮤지컬, 소설 장르로의 번역을 경험하셨습니다.
=만화를 포함한 모든 장르에는 각각의 약점이 있게 마련이죠. 소설이나 공연의 대본은 작품의 정수를 담은 기본이기 때문에 작가인 제가 직접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화에서 설명하고 싶었던 부분을 소설에서, 소설에서 연출할 수 없는 부분은 만화로 하니 운이 좋구나 싶었죠. 예컨대 유리 왕은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게 어느 순간 나를 들볶은 인물 중 하나인데, 만화보다 소설로 굿을 하니 더 잘됐어요. 제가 대본을 쓴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이동준씨의 음악작업과 배우들의 연기를 무척 고맙게 생각해요. 어떤 작품을 만들어가는 동안 사람이 성장하는 것이 보일 때가 있는데, 뮤지컬을 만드는 동안 배우들이 변화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 굉장히 기뻤어요. 본디 나약하고 소극적인 배우가 있었는데, 상대 캐릭터가 무대에서 자극했을 때 갑자기 힘을 받아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신세계를 본 느낌이었어요. 제 머릿속에서야 캐릭터들이 상상한 대로 반응하지만, 저도 아닌 배우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배우란 저런 것이구나 감탄했어요.
“<운명>의 내몰리는, <레퀴엠>의 협박당하는 느낌이 좋아요”
-혹시 사람들의 말투 중에 특별히 싫어하는 말투가 있으십니까?
=“애기야”, “우리 애기가” 이런 식의 표현에 굉장히 강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식에게 하든 다른 성인에게 하는 경우든 아주 싫어요. 아기란 주기만 하고 받는 대상이 아닌데, 누군가를 동등한 대화상대로 기대한다면 그런 취급을 해서는 안 되겠죠.
-베토벤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작곡가도 모든 곡을 좋아하진 않아요. 베토벤은 <운명>을 들을 때 내몰리는 기분, 모차르트 <레퀴엠>의 협박당하는 느낌을 좋아해요. 말하는 바가 뚜렷하잖아요. 어느 대목에서 작곡가가 튀어나올 때, 그의 역사가 노출될 때 가장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도 작품을 하면서 수시로 벌거벗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시고 그것이 당연한 상태라고 보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작가란 대단한 존재는 아니에요. 단지 자의식 과잉이죠. 아무리 신인이 수줍고 나약한 척해도 저는 “네가 얼마나 간이 부었으면 네 그림을 팔 생각을 하냐”고 말해요. 자기 글이, 작품이 돈 받고 팔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의식 과잉이에요. 물론 자기 생각이 옳지도 않은데 솔직하겠다고 마구 쓰면 안 되죠. 작가는 공정하기도 해야 해요. 자기 생각만 떠들면 그건 잡소리에 불과합니다.
-후배들을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술가를 교육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도와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잠시 열어줄 수는 있겠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사람들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을 말하는데 1%가 없으면 99%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어요. 1% 영감만 갖고 노력 안 하는 자는 당연히 안 되지만, 만약을 위해 혹시 1%가 있을까봐 이왕 내친 김에 달리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진짜 가능성 있는 아이들은 자기 세계가 이미 있기에 굳이 다른 데로 끌 필요가 없죠. 밟지만 않으면 돼요. 교육이 잘못될 때는 그런 싹을 밟을 때입니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싹이기 때문에 딴 짓을 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허브>에 연재하시는 <조우>는, 태어나서 제가 읽은 가장 난해한 만화 같습니다. 대사, 캐릭터, 배경이 루프처럼 반복되면서 무의식을 그리고 있는데, 만화만이 가능한 고유한 화법을 탐구하겠다는 결의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 회를 남겨놓고 있는데, 저도 어렵습니다. 만화만의 어법이라기보다 정형을 깨고 무의식 심층에 직접 들어가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 꿈 하나를 세팅하고 싶었죠. 그중 진짜를 골라내면 진짜 사건을, 가짜를 골라내면 다른 사건을 볼 수 있는 모양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만화는 근본적으로 소설보다 불친절하기 때문에 텍스트가 당연히 열려 있거든요. 그 열린 텍스트에서 누군가의 스키마(schema: 도식)를 끌어내고 확장하는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김기혜, 김혜린, 장태산, 김광성 작가와 함께 웹진 <WE6>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만화계의 많은 변화를 체험한 작가님들의 연합체인 만큼 명확한 목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탐색하고 안정적인 지면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실험하고 반응을 보는 마음 편한 장소가 필요했죠. 독자들도 이탈이 별로 없는데 마감이 늦어져 작가들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라고 서로 추궁하고 있어요. (웃음) 12월15일자 이후 업데이트가 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실험에는 온라인 만화의 레이아웃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업체에서는 스크롤 방식도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괜찮다’와 ‘보기좋다’는 다르거든요. 작가가 읽는 속도를 제압하지 못하고 스크롤로 보는 인터넷 만화는 마치 비디오를 서치로 돌려 대충 보는 것과 같아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면이 다르면 연출도 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면의 세로연출을 인터넷의 가로연출로 재편집하는 데에 3일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보람은 있습니다. 다른 해석도 들어갈 수 있고요. 휴대폰으로 보는 만화도 있는데 그건 또 영화의 그림콘티 같은 개념이더군요. 왜 이리 배울 것이 많은지, 재미있습니다.
-만화를 통해, 인간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가가 무슨 권리로 인간은 이러하다고 마침표를 찍겠습니까? 작품을 완결은 시키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난해해지고 있죠. 만화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감정을 다듬고 조율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만화가 격렬한 줄 알지만 실은 굉장히 드라이합니다. 만화는 캐릭터가 연기를 하고 그 연기를 반복하는 것이라 그 과정에서 감정에 대해 좀 차가워집니다. 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차가워집니다. 그러므로 만화의 웃음은 수차례 걸러진 것이고 어디나 냉소가 들어 있어요.
-지금 만화는 선생님에게 무엇인가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요. 지식도 그렇지만 경험이나 관계에 관해 배우는 것이고 제게는 그 배움의 과정이 만화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만화만이 아니라 콩나물을 팔아도 도를 터득하면 도인이 돼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도 어떤 분의 얼굴은 탐욕스럽고 어떤 분은 해탈한 얼굴을 하잖아요. 화두를 해결한 인간의 얼굴,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