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씨네21>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오는 오리배를 떠올릴 분이 많을 테고 요즘 뉴스 많이 보시는 분들이라면 그 무섭다는 조류독감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리궁둥이, 오리발, 오리주둥이, 오리너구리 같은 복합어들도 줄줄이 떠오른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 같은 속담도 있다. 좋은 이미지라고는 거의 없는, 한마디로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이미지를 모아 만든 날짐승이 바로 오리인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바웃 어 보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히피 엄마를 둔 어린아이가 엄청나게 큰 빵을 호수 위의 오리에게 던져 오리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오리는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궁둥이를 물 위로 내놓은 채 떠 있다. 영화에서 동물이 죽으면 원래 슬프게 마련인데, 빵에 맞아 죽은 그 오리는 어쩐지 무척 웃겼던 것 같다. 그러니 만약 백일장 같은 데에서 누군가가 ‘오리’를 시제로 주고 뭘 쓰라고 한다면, 정말 여간한 재능이 아니고선 괜찮은 뭔가를 써낼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한 시집을 ‘건졌다’. 이윤학이라는 시인의 시집인데 만날 때마다 술에 취해 있고 간혹 안 취해 있을 때는 그런 이들이 늘 그렇듯 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내 또래의 시인이다. 시집의 제목은 <그림자를 마신다>였다. 무심코 시집을 반으로 쪼개 펼치자 11페이지에 <오리>라는 시가 떡하니 있었다. 도대체 오리를 가지고 뭐 얼마나 대단하게 썼을까 싶어 심드렁하게 읽어나갔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걸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서 그냥, 정말 멋진 연시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은 꾹 누르고 대신, 적어도 그의 시집보다는 판매부수가 많을 것 같은 <씨네21>의 지면을 빌려 멋진 시를 읽은 감사의 마음도 전하고, 또 이 스산한 가을을 겨우 통과하고 계신 독자 제위들께도 일독을 권하려고 한다. 전문을 인용한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런 사랑 있다. 아, 우리 이제 그만 쑤시자.
오리
이윤학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