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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었다
신정구(작가) 2005-11-25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나와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15년… 내가 16살이 되던 해에 나를 떠나셨다. 나는 나의 아주 어렸던 시절까지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기억이 약간 흐릿할 뿐…. 그 이후는 지난해 10월, 아티지아노의 라떼를 처음 먹던 날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과장된 거 인정한다. 암튼 그토록 병적인 나의 기억력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술이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지도 물건을 부수지도 밥상을 뒤엎지도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걸지도 않으셨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신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에 앉아 늦은 밥상을 받으시고는 나를 불러 그때는 너무도 귀했던 구운 김에 밥을 싸서 간장에 살짝 찍어 주셨다. 나는 새끼 새처럼 주둥이를 벌려 짹짹거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주무셨다. 평소에도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난 뒤엔 더욱 침묵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참 싫었다. 술의 힘을 빌려 호탕하게 웃으시길 바랐다. 지갑을 열어 감춰둔 비상금으로 용돈을 주셨으면 했다. 엄마와 형과 누나와 나에게 낯간지럽게 사랑한다는 말도 해주셨으면 했다. 힘들다는 넋두리를 엿듣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그러시질 않았다. 그냥 조용히 주무시기만 했다. 오늘 나는 많은 술을 마셨다. 마냥 눕고만 싶고 자꾸만 자고 싶었다. 그래서 웅크린 채 두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백만 가지 생각이 지나쳐 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새삼스레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고도 싶고 나를 미치게 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은 화를 내고도 싶었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친구에게 궁색한 변명도 늘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꼭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힘들다고 행복하다고 머리 아프다고 토할 것 같다고 기쁘다고 울고 싶다고…. 나는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묻고 또 묻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떠올랐다. 두눈을 감은 채 벽을 향해 등 돌려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던 아버지의 밤은 나와 같았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