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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교한 유혹의 기술, <시티 오브 갓>

현실성을 강변함으로써 거짓 쾌감을 만드는 <시티 오브 갓>

2002년에 만들어진 <시티 오브 갓>은 브라질의 빈민촌 ‘시티 오브 갓’을 무대로 폭력과 범죄의 아수라를 한 소년의 시선으로 묘사한, <펄프 픽션>과 <좋은 친구들>을 뒤섞어놓은 듯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씌어진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 타란티노도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폭력 묘사와 거리에서 직접 캐스팅한 어린 연기자들이 벌이는 생생한 연기, 그리고 뮤직비디오풍의 현란한 영상과 잘 짜여진 이야기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찬반논란 속에서도 높은 비평적 주목을 받았다.

흥미로운 건 <시티 오브 갓>을 두고 그 견해를 경청하고픈 국내 평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렸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간혹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현실’이란 의제를 두고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한 평자는 “폭력을 성찰한다는 구실 아래의 폭력 묘사도 폭력을 소비하는 역설”이라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평자는 “참혹한 현실에 눌리지도 착취하지도 않으면서 대담하게 간다”고 말했다. 전자는 현실을 착취했다고 말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전자에 동의하지만 그 근거를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엇갈린 평가를 하나의 질문으로 삼는 일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현실을 소비하거나 착취하지 않는 방식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먼저 말해져야 할 것은 현실에 대한 지식이 이 진술의 판단 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중 누구도 ‘시티 오브 갓’의 현실을 알고, 그 지식에 비추어 이 영화가 현실을 착취했는지 여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모르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그것을 영화화하는 방식이 정당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킬 빌>과 <시티 오브 갓>의 차이

이 영화의 방식에 대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스스로는 이렇게 말한다.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수십명의 사람을 죽일 때 관객은 그것이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름답고 짜릿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화면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고 갱이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영화를 보고 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윤리성을 변호하고 있는 이 진술은 명쾌하게 들릴지 모른다. <킬 빌>에서 우마 서먼이 80명의 일본 야쿠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잔혹하되, 그의 말대로 아름답고 짜릿하다. 그러나 <시티 오브 갓>의 폭력은 사악하고 역겨우며 무표정하게 살인행각을 벌이는 소년들의 모습은 거의 악마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 소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메이렐레스 감독의 진술에는 두 가지 난점이 감춰져 있다. 하나는 그가 영화에서 동일시의 과정이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에서 미화된 특정 캐릭터에만 한정된다고 보는 것의 문제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동일시의 대상은 단일하지 않으며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오간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시각적 쾌락은 대개 끝없이 탐식적이어서 그 대상은 영화 속 행위와 신체, 미장센에 두루 걸쳐진다. 나는 그 사악한 소년이 되고 싶진 않지만 그 소년이 호텔의 전 직원을 이유없이 살해하는 행위는 내게 어떤 쾌감을 가져다준다.

역겹지만 보고 싶은 것이며, 그 소년이 되고 싶지 않다고 내 의식은 말하지만, 그 잔혹한 장면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사자가 사슴을 사냥하고 포식하는 잔혹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폭력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지는 순간 소비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본다. 이 영화의 광고전단지는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에 유쾌한 청량제가 되어줄 영화’라는, 아마도 감독이 원치 않았을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그 소비를 선동한다.

더 중요한 문제는 <킬 빌>과 <시티 오브 갓>이 텍스트 안팎에서 현실을 지칭하는 방식이다. <킬 빌>은 처음부터 전적인 허구라는 사실을 위장하지 않으며, 극이 진행될수록 동서양의 수많은 장르영화들을 인용함으로써, 자의식적으로 장르적 신화의 세계에 진입한다.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영화다.

현실성 강조로 소비효과를 증대시키다

반면 <시티 오브 갓>은 자신이 현실과 맺는 관계의 직접성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주요 배역은 전부 ‘시티 오브 갓’에서 직접 캐스팅했으며 대사도 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촬영지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실제 장소를 택했으며, 개봉할 당시에는 당시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룰라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공공복지정책을 수정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명시하고 있으며, 엔딩 크레딧이 뜰 때에는 체포된 갱의 실제 인터뷰까지 덧붙이는데 그 인터뷰는 영화 속의 대사와 완전히 일치한다. <시티 오브 갓>이라는 텍스트 안팎에 ‘현실적’이라는 수사가 주문처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의 주인공의 대사, “리오의 그림엽서에는 이곳이 담겨 있지 않아.” 이 영화가 바로 ‘시티 오브 갓’ 의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러나 의심스럽다. 이 영화가 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판별하는 일은, 평자가 할 일이 아니며 그럴 능력도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도, 그것이 극영화의 방식을 거치는 순간,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해석이 된다. 다큐멘터리조차 편집되지 않은 하나의 숏이 지속되는 동안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의심스러운 건 그 스스로 자신의 현실성을 텍스트 안팎에서 강변하기 때문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경구를 상기해보자.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 속에서는 거짓은 진실에 의해 부각되고, 진실은 거짓에 의해 방해받는다.” 브레송이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든 예는 난파된 배의 아이러니다. 진짜 태풍에 난파된 배가 있다. 그런데 난파장면을 찍기 위해 영화 제작진이 실제로 난파된 이 배 위에서 촬영을 했다. 배우가 그 진짜 배 위에서 난파의 공포를 연기했다. 그럴 때 “우리는 배우도 선박도 태풍도 믿지 않게 된다”고 브레송은 말한다. 그의 다른 경구.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은 거짓을 드러내고 만다. 거짓도 그것이 일관된 경우 진실로 비쳐진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매우 솜씨있는 장르영화감독이며 <시티 오브 갓>은 뛰어난 범죄스릴러의 자질이 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캐릭터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구성은 탄탄하고 영상 테크닉은 달인의 경지다. 그러나 이 영화가 현실성을 강변하는 순간 그것은 장르라는 거짓의 쾌감을 확대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일임을 믿게 함으로써, 그것의 소비효과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현란하고 과도한 폭력 묘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포장하는 텍스트 안팎의 수사에 반대한다. 그것은 영화를 유사 스너프필름으로 전락시키는 길이다. <시티 오브 갓>은 신화의 베일을 벗어던진 (유사)현실이 아니라, 현실성을 포장함으로써 더 간교해진 신화다. 메이렐레스 감독의 소망과는 달리, <킬 빌>의 온전한 거짓이 훨씬 더 윤리적이다.

너무도, 너무도 성공적인 유혹의 기술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극장에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가 외롭게 상영되고 있다. <시티 오브 갓>과 <과거가 없는 남자>는 모두 2002년 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주인공이 모두 비참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사는 인물이며, 그들의 비루한 거주공간이 영화의 주 무대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한 점이 있다. 카우리스마키는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1990년대의 정책실패로 인해 비참한 생을 사는 빈민의 삶을 알고 난 뒤에 그것에 관한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거울을 볼 자신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영화 제작의 표면적 동기도 <시티 오브 갓>과 통한다. 그러나 두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폭력적인 현실을 그리는 방식의 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엉성하게 패러디한다. 중년의 사내가 거리에서 퍽치기당해 병원으로 실려가지만 곧 죽는다. 그런데 갑자기 살아나 병원을 나간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쓰러진 그를 컨테이너에 사는 빈민 부부가 보살핀다. 회복한 그는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구세군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가 죽었다가 ‘그냥’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종교적 기표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직업소개소의 공무원은 그를 불법이민자로 단정해 내쫓지만, 식당 주인은 그를 보고 ‘이유없이’ 놀라며 무료 식사를 제공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몰라 “십자가로 서명을 대신 할까요?”라고 구세군 간부에게 묻는다. 그가 구애할 때 그의 얼굴 뒤에는 둥근 창문이 후광처럼 잡힌다. 그를 착취하는 경비원은 “나는 베드로처럼 당신을 세번 부인할 것이오”라고 말한다.

혹시 그는 재림한 예수일까. 이 은근한 미스터리는 그가 도박벽으로 이혼당해 떠도는 용접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허무하게 증발한다. 그는 구원자이기는커녕 구원받을 특별한 자격조차 없는 비루한 남자였을 뿐이다. ‘그냥’과 ‘이유없이’는 해명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부활의 패러디의 실체는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내적 필연성도 외적 개입도 없이 죽음에서 살아났다. 그 기적이 농담이라면 이 영화 전부가 농담이다. 농담으로 빚어낸 앙상한 서사 사이를 가난한 이들의 뚱한 표정과 그래도 남은 온정과 구원이 아닌 사랑의 노래가 채운다. 이 영화는 서사의 폐허 위에서 펼치는 가냘픈 위안의 퍼포먼스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브레송의 방식으로 브레송과 달리 구원이 아니라 위안을 긍정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신화되기를 포기하고 영화의 무력함을 받아들인다.

남은 문제는 결국 신화를 축조하는 유혹의 기술이다. <시티 오브 갓>은 실재하는 몰살의 스펙터클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에 등장한 유혹의 기술이다. 그 유혹은 성공적이어서 한 나라의 정책까지 바꾸었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유혹하지 않고 극소수에게 위안을 주었을 뿐이다. 간교한 유혹과 무기력한 위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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