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읽는 것일까, 듣는 것일까. 예를 들어 밥 딜런이나 김광석을 (수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올린 <이사> 공연 전, <이사>의 초반을 직접 낭독하고 있는 김영하.
몇년 전 벤저민 제퍼니아라는 영국 시인이 서울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버밍엄의 빈민가에서 자라난 그는 18살 때까지 문맹이었다. 문자를 몰랐지만 그는 이미 시인이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경책을 읽어주시면 그걸 외워 교회 밖에서 랩으로 만들어 ‘낭송’했다. 그는 들었고 들은 것을 자기 리듬으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뒤늦게 영어를 배웠고, 배웠으니까 이제는 다른 시인들처럼 종이에 시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 스물두살에 첫 시집을 냈다. 그러나 주변의 누구도 그가 낸 시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살기도 바쁘고 문맹률도 높은 그 빈민가에서 누가 그 시집처럼 고상한 것을 읽고 앉아 있겠는가.
그뒤, 그는 달라졌다. 이제는 거리에서, 대영박물관에서, 골목에서,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 자작시를 낭송했다. 그의 시에는 리듬이 있어서 마치 랩처럼 들렸다. 영국의 포클랜드 침공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대처리즘에 대해 반대하고 야유했다. 라디오에 출연해 즉석시로 정치적 공격을 감행했다. 얌전히 앉아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자가 어떤 문제에 관해 물으면 그 즉석에서 시를 지어 낭송했다. 말하자면 그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체포되었지만 그런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몇년 전 서울에 왔을 때 한국의 시인들을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이 지은 시의 대부분을 외워서 낭송한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원고가 필요없었다.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나가 마치 래퍼처럼 중얼중얼 흔들흔들 자신의 시를 낭독했다. 동시통역 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했다. 카리브해 출신답게 온 몸에 배어 있는 리듬에 시어를 얹어 전달했다. 그에게 시란, 조용히 집에 앉아 시상을 가다듬고 그것을 적어 출판사에 보내고, 그러면 출판사는 그것을 묶어 시집을 내고, 작가는 서점에 나가 독자들에게 사인을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시가 쌓이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돈을 받고 시를 낭송한다. “적어도 현재의 영국에서 길을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시인은 아마 저뿐일 겁니다. 낭송회 입장료로 먹고사는 시인도요.” 그는 말했다. 당연히 그의 행보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길에서 즉석에서 지어 행인들 앞에서 낭송하는 것도 시냐?’, ‘저게 랩이지 시냐?’ 같은 반론은 모두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벤저민 제퍼니아를 지지하는 쪽은 “본래 시란 저런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출판된 시집을 읽는 전통은 불과 몇 백년 사이에 만들어진, 오히려 연조가 짧은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시는 입에서 입으로, 대부분은 노래의 형식을 빌려 전파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논쟁이 가능한 것도 실은 유럽의 문학 전통 기저에 ‘듣는 문학’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치르며 한국 작가들이 놀란 것 중의 하나는 낭독회마다 몰려든 열정적인 청중이었다.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두 시간 가까이 귀기울여 듣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서점에는 책의 내용을 작가의 육성 또는 성우의 음성으로 녹음한 오디오북의 판매가 활발하다. 매출의 20%에 육박한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다. 낭독을 잘하는 작가들이 스타가 되고 낭송을 잘하는 시인은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회. 문학을 ‘듣는’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우리 전통에선 벤저민 제퍼니아 같은 시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 혹은 시문은 전통적으로 선비들의 것이었다. 문학은 수양의 수단이었지 청중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선비들은 조용히 시를 짓고 때가 되면 그것을 엮어 문집을 냈다.
‘듣는 문학’과 ‘읽는 문학’.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의 전통이 서로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어떤 접점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디오북이 팔리고 서양에선 동양의 수줍은 시인들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