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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고윤희의 러브토크 [2]
사진 오계옥 정리 김도훈 2005-11-17

사랑은 안 변해도 연애는 변하더라

고윤희/ 지금 연애는 하고 있는가.

배종옥/ 아니.

고윤희/ <러브토크>는 어쩌면 <연애의 목적>과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다. 그래서 <연애의 목적>은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배종옥/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재미있게 봤다. 젊은 아이들이 젊은 감성으로 저렇게 연애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윤희/ 사실 나는 창피했다. 20대에 썼던 시나리오여서.

배종옥/ 신선했다. 원래 20대에는 그런 연애를 하는 거지 뭐.

고윤희/ 그 시나리오를 스물아홉에 썼다. 그런데 서른이 넘는 순간, 사춘기가 오는 것처럼 사람이 확 변하더라. 그래서인지 지금은 <연애의 목적>이 좋은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쓸 때는 진실한 감정이라 믿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제는 사랑을 해도 겁이 나고, 방어하고 숨거나 애당초 딱 잘라버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다보니 이젠 <연애의 목적>도 유치하고 어려 보인다. 오히려 <러브토크>를 보며 공감했다. 마치 내가 써니 같았다. 써니는 누군가를 특별히 마음에 품지 않고, 설혹 호감이 있어더라도 애당초 포기해버리지 않나. 사랑이란 게 상처니까. 그래서 오히려 <연애의 목적>에 나오는 애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다시는 저런 사랑이 오지 않겠구나 싶어서. 배종옥/ 왜. 평생 <러브토크> 같은 사랑만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나는 어려서나 지금이나 상처받을까봐 항상 두렵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기가 힘들다. 그런데 막상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어릴 때나 지금이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물론 어릴 때보단 더 재고 피하게 되고, 그래서 바라보기만 하는 순간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굴 사랑할 때는 어렸을 때처럼 나에게는 전부가 된다. 어릴 때 사랑과 나이든 사랑이 과연 다를까? 물론 사랑의 깊이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그 의미조차도 달라질까?

고윤희/ 사랑하는 감정 자체는 똑같을 것도 같다. 10대 때나 지금이나 사랑이 유치하고 구질한 건 같으니까. 나이가 들면 더 용감해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무서워서 사랑 못하겠다.

배종옥/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고윤희/ <러브토크>가 이성에 관한 영화라면 <연애의 목적>은 이성이 없는 영화다. 이성을 지키는 어른들이 보면 철딱서니 없고 짜증날 수도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인 사랑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순수한 것. 그냥 육체가 앞서는 대로 좋아하는 감정도 모른 채 뛰어드는 사랑 말이다. 어릴 때는 연애의 결과를 생각하지 못한다. 설사 예측해도 제어가 안 된다. 서른 넘으면서부터는 연애의 결과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게 된다. 그게 보이는 순간부터 못 뛰어들겠더라. 겁이 나고. 연애할 힘이 없다 더이상.

배종옥/ 이런 질문을 종종 듣는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지냐고. 마치 내가 20대 때 마흔 넘은 여자를 늙은 여자처럼 느꼈던 것처럼, 마흔을 넘은 여배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들 궁금해한다. 근데 마흔 넘어보니 세상은 다를 게 없다. 어떨 때는 내 나이도 잊어버린다. 나는 30대 중반이 제일 좋았고, 이후로는 항상 그 나이에 머무르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깜짝 놀란다. 그래 내가 마흔 넘었어, 이러면서. (웃음) 물론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는 순간 세상이 잠깐 달라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큰 변화는 없다.

고윤희/ 내가 늙었다고 느끼는 건 태도의 문제인 것 같다. 10대 때는 20대가 되면 고통도 고민도 없고 평화로울 줄 알았다. 근데 스물이 되니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근데 서른이 되니까 마음은 10대와 같은데도 달라진 눈빛을 보고 슬퍼질 때가 있다. 그래서 서른 넘으면서 연애는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비관적인 순간에 <러브토크>를 본 거다. 이거야말로 어른의 사랑 이야기 같았다. <연애의 목적>이 애들의 사랑이라면, 그래서 유치하고 더티하다면, 그래서 아름답지만 이성은 없다면, <러브토크>는 사랑의 감정과 이성이 같이 있는 사랑 이야기다. 그래서 슬프지는 않은데 쓸쓸하다.

배종옥/ 적당한 지적이네.

고윤희/ 20대에는 연애를 좋아했고, 많이 했고, 또 사랑에 잘 빠지는 감정형 인간이었고, 굉장히 치열하게 연애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편하지만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상태가 더 좋긴 하다.

배종옥/ 지금이 좋으면 된 거다. 사람들은 너무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다. 지금에 머무르는 게 좋으면 그걸로 된 거다.

사랑했던 남자들, 복수하고 싶던 남자들

고윤희/ 사랑에 잘 빠지는 편인가.

배종옥/ 사랑하면 그 사람만 보는 것 같다. 고윤희씨는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나.

고윤희/ 마초적인 남자를 좋아한다. 나를 강하게 휘어잡고 노예처럼 부리는 남자를 좋아한다.

배종옥

배종옥/ (웃음) 그런 남자 만나본 적 있나.

고윤희/ 아니.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마초였던 남자들이 몇 개월 지나면 순종적이고 쩔쩔매는 타입으로 바뀐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거다. 원래는 소심한 남자가 맞는데, 내가 마초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마초인 척했던 거다. 물론 내가 진짜 마초를 좋아하는 건 아닐 거다. 진짜 마초를 만났다면 싫어서 도망을 갔을 거다. (웃음) 어떤 남자를 좋아하나.

배종옥/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좋다. 내가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나는 친구 같은 사람이 좋더라. 옆에 있는데 옆에 있는 것 같지 않는 남자, 말할 때는 말도 하고,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말 안 하고 그냥 있어주는 남자. 그런 남자가 좋다.

고윤희/ 그런 남자들만 만났나.

배종옥/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대게 나에게 참 잘해줬던 것 같다.

고윤희/ 지석 같은 남자들 아닌가.

배종옥/ 지석이 뭐 그렇게 써니한테 잘하나. 아예 별 관심이 없는 거지. (웃음)

고윤희/ 지석은, 같이 술을 마시고 뻗어도 덮치지 않고 침대로 모셔주고, 아침에는 해장국 끓여주는 머슴 같은 남자 아닌가. 근데 지석 같은 남자가 좋은가 유림 같은 남자가 좋은가.

배종옥/ 내 스타일은 둘 다 아니다. 특히 유림 같은 작업의 명수는 나 같은 여자 안 좋아하더라. (웃음) 근데 나는 유림이 그렇게 작업하는 남자 같지는 않았다. 그냥 홍이 너무 좋은가보다 싶었지.

고윤희/ 철딱서니가 없는 거다. 술을 마셔서 취한 상태에서 꼬시니까. 그러고보면 지석과 유림은 닮았다. 지석이 술을 마시면 유림처럼 될 것도 같다. 이를테면, 유림의 모습이 남자들의 가장 본능적인 모습이라면 지석은 보편적인 남자들이 가장 매너 좋고 착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 그러니까 유림이 그냥 막무가내로 내지르는 것도 소심해서 그런 거다. 유림처럼 술 취해서 내지르는 것도 소심함이고, 지석처럼 손 안 대고 해장국 끓여주는 것도 소심함이고. 정상적이고 대범한 남자라면 술 취하지 않아도 매너 좋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텐데.

배종옥/ 상대는 늘 그 자리에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이 좋을 때는 내 시각으로만 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남자가 똑같이 물 마시는데도 나는, 어머 이 남자는 역시 물 마시는 모습도 달라(웃음),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데 내 감정이 걷히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현상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고윤희/ 그건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감정 아닐까. 어릴 땐 아무에게나 꽂히면 사랑을 한다. 근데 나이가 들면 변할 것이 두려워서 마음속에서 패턴화를 한다.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A형 남자는 이렇고 B형 남자는 저렇겠지 하는 식으로.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오히려 어릴 때보다 더 어린애처럼 흔들린다.

고윤희/ 감정이 약한 편인가.

배종옥/ 강하지 않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것 때문에 힘들어할 걸 아니까. 아마도, 내가 사랑에 관심없다고 말하는 내면에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아예 관심없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윤희/ 그래서 배종옥씨는 정말로 써니 같다. 상처를 준 남자가 죽이고 싶거나 복수하고 싶을 때는 없었나.

배종옥/ 그러고 싶지 않더라. 돌이켜보면 내가 잘못한 일들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다가도, 내 행동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했겠구나 싶고.

고윤희/ 나는 복수심이 굉장히 많다. 감정형 인간이라서. 살인청부업자 찾아간 적도 있다. 결국 못 찾았지만.

배종옥/ (웃음) 아니, 노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고윤희/ 그랬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신했기 때문에 더 복수심이 커진다. (웃음) 사실 노예가 되고 싶지만 나의 원래 습성은 노예가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를 주면 내가 노예였다는 사실만 남으니까 미움이 더 커지는 것 같다.

배종옥/ 그래서. 살인청부업자를 못 찾아서 어떻게 했나.

고윤희/ 권총을 사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배종옥/ (웃음) 그 다음에는.

사랑, 질려서 미치겠는데 벗어날 수 없는

고윤희

고윤희/ 방향은 다른데 결과는 똑같아지더라. 온갖 지랄을 다 했다가 결국 써니처럼 술마시고 울면서 혼자서 잠이나 자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같은 복수는 가능하지가 않더라. 사실 육체적인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은 여린 사람들이다. 극단적인 것은 여린 마음에서 출발하는 거다. 정신적으로 복수하는 사람은 엄청 강한 사람일 거다. 정신적 복수를 하고 나면 자기는 열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정말 강하거나 무딘 사람 아니면 못한다.

배종옥/ 그런데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 만약 내가 미치도록 사랑을 했다면 후회는 안 한다. 근데 사랑도 제대로 못했는데 헤어지면서 상처받고 이러면 화나잖아. ‘Smoke Gets in Your Eyes’라는 말이 있지.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누군가가 내 눈에 안개가 끼도록 만든다면, 그 사람이 나와의 사랑을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할지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진실했으니까.

고윤희/ 그렇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미치도록 사랑도 못한 채로 끝나서 이도저도 안 된다면 그건 정말로 화가 난다. 차라리 10대나 20대 때처럼 미치도록 사랑이라도 했다면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텐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상대방에게 화가 난다. 저 새낀 왜 날 사랑에 빠지게 하지도 못하고 끝냈을까, 하고.

배종옥/ 그러니까 끊임없이 글을 써라. 연기도 그렇다, 실패든 성공이든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글도 그래야 한다. 그러면서, 나이도 같이 먹어야 한다.

고윤희/ 나는 작가 일이 고통스럽다. 진실을 보는 게 싫다. 어쩔 수 없이 진실에 근접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싫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구질구질한지.

배종옥/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타인을 이해할 수 있잖아.

고윤희/ 과연 이해할수 있을까.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고통스러워서 지금은 피하고 싶다.

배종옥/ 그럼 그런 이야기를 쓰면 된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을 알면서도 그른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것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옳은 것만 하나. 때로는 옳지 않은 걸 하면서 더 큰 옳음을 찾을 수도 있잖나. 그런 갈등의 순간이 드러나는 게 영화가 아닌가 싶다.

고윤희/ 다음에는 내 작품을 해줬으면 한다. 사실 <연애의 목적> 같은 영화를 다시 쓸 생각은 없고. 다음에 그냥 기회가 되면 같이 영화를 하고 싶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배종옥/ (반복하며)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근데 이게 이야기로만 끝나도 상관없고, 실천으로 끝나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다. 내가 항상 현실의 사랑이 지겹다 지겹다 이야기는 하지만, 작품으로 표현하는 사랑은 얼마든지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윤희/ 사랑 이야기는 나도 질렸다.

배종옥/ 그럼, 질린 사랑 이야기도 있잖나.

고윤희/ 질려서 미치겠는데 벗어날 수 없는 사랑.

배종옥/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지겨워 죽겠지만.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끌려가는 게 사랑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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