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에서 가장 기괴한 작가 찰리 카우프만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미셸 공드리가 만나 완성한 두 번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11월10일 개봉한다. 사랑했던 남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여자와 그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남자의 따라잡기 힘든 현란한 숨바꼭질이 펼쳐진다. <이터널 선샤인>의 탄생과정과 그것을 세상에 내놓은 카우프만-공드리의 합작 세계, 그리고 흥미롭게 재단되어 있는 영화의 구조를 미리 들여다본다. 그래, 세상은 요지경인데 사랑만이 불변이다. 카우프만과 공드리가 전하는 이 전언을 따라가보자.
“당신은 그/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이제 그/그녀는 더이상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내용이 담긴 서신 하나를 받는다면, 그 누군가의 삶은, 혹은 이야기는 이제부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공드리가 친구 피에르 비스무스에게 들은 아이디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이 단상으로 세 페이지짜리 시놉시스를 만든 다음 프로듀서와 각본가들을 찾아다녔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이런 이야기는 뭔가 “한 사나이가 있고, 그는 비밀을 갖고 있으며, 그 비밀의 기억이 지워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든다”는 식의 스릴러 장르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고, 그게 아니라면 같이 할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셸 공드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뭔가 다른 인간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케이트 윈슬럿, 찰리 카우프만, 미셸 공드리(왼쪽부터)
그때쯤 같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자, 친한 동료이기도 한 스파이크 존즈가 괴상한 각본가 한명을 소개해주었다. 스파이크 존즈의 장편영화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었다. 그 둘은 공통의 코드를 확인했던 자리로 그 첫 만남을 기억한다. 미셸 공드리는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불안, 세상을 보는 어떤 관점, 기하학적 패턴에 대한 매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가 그의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추락하고, 펼쳐지고, 접히고 그리고 횡단하는 바로 그 흥미로운 방법”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찰리 카우프만 역시 “우리 둘은 기억과 꿈과 그런 종류의 세상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카우프만은 공드리가 들고온 이 이야기를 “관계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공드리가 찾아다니던 인간적인 이야기였다.
한때 내가 절실히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기억에서 억지로 지운 뒤라면 이제 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공드리와 카우프만의 영화적 합의점이었다. 때맞춰 12세기의 비통한 고전 러브스토리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서신 왕래를 읽고 있었던 카우프만은 거기에 영감을 받아 알렉산더 포프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라는 시의 한 구절 ‘순결한 마음의 영원한 빛’(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을 가져와 영화의 제목(이 영화의 원제)으로 삼았다. 기억을 말소당한 연인들의 러브스토리 <이터널 선샤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독창적인 뮤직비디오 감독
현존하는 할리우드의 각본가 중 자신의 고집스런 상상적 모토와 장르적 관습 사이의 협상 출구를 가장 재치있게 찾고 있는 찰리 카우프만에 대한 소개는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을 계기로 국내에 이미 알려진 바가 있다.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공드리에 대해서는 뮤직비디오의 팬덤이 아니라면 낯설 수도 있다. 그는 음악에서 영화로 건너온 사람이다. 자신이 드러머로 속해 있던 밴드 위위(2집 앨범까지 내고 1992년에 해체했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의 연출 경력은 시작됐다. 20대 초반 아트 스쿨을 다니며 그래픽을 공부했던 것이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위위의 뮤직비디오, 그를 유명하게 한 비욕과의 <Human Behaviour> 작업을 비롯하여, 롤링 스톤스, 라디오 헤드, 벡, 케미컬 브러더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등 많은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게 되었고, 적어도 뮤직비디오의 역사 안에서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창적인 지문을 가진 창작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 공드리의 공식적인 첫 장편영화 데뷔작이 <이터널 선샤인>이 아니라 <휴먼 네이쳐>(2001)가 된 것은 <어댑테이션>의 각본 마무리 때문에 도저히 함께할 수 없었던 카우프만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공드리는 그렇다면 카우프만이 이미 써놓은 <휴먼 네이쳐>를 데뷔작으로 해보겠다며 그 각본을 넘겨받았고, 스파이크 존즈를 프로듀서로 앞세워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휴먼 네이쳐>는 상업적으로도 밋밋한 성과를 거뒀을 뿐 아니라, 카우프만의 기괴한 원본을 창조적 이미지로 각색하는 데에도 모자람이 많았다. 원시와 문화의 경계를 건너뛴 다음, 늑대 인간과 도시 과학자의 본성과 양식을 혹은 천성과 양육을 기괴하고 천연덕스럽게 동석시킨 이 영화는 그 소재 자체로는 희귀한 변종의 드라마였지만, 거기에는 미셸 공드리의 숨결을 느낄 만한 것이 적었고, 단지 카우프만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겨우 세워놓은 티가 역력했다. 그건 누구보다 공드리 자신이 가장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휴먼 네이쳐> 뒤에 한 일은 반성의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즉 “<휴먼 네이쳐>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과 모든 문제점들을 40페이지에 걸쳐 적어놓은” 분석적인 반성문을 쓴 것이다. 그런 데뷔작의 실패와 자성의 점검을 거친 뒤 다시 착수한 것이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카우프만의 각본을 바탕으로 만든 공드리의 두 번째 공식 장편이면서, 더 정확히는 카우프만과의 공통점을 이상적으로 수렴해낸 공드리의 진정한 연출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