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 폭풍을 불러올 수 있을까? 흔히 ‘나비효과’라 부르는 표현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것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한 의존성’, 작은 요인이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정구 파문을 보면서 이 기상학의 이론이 정치학에도 적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난 일을 보자. 어느 교수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러자 경찰이 조사를 하고, 검찰이 구속을 시도하고, 장관이 서면지휘를 하고, 검찰총장이 사퇴를 하고, 보수야당이 범국민 구국운동을 벌이고, 9천명의 노인들이 시국성명을 내고, 7천명의 우익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천 장관과 강 교수 앞으로 하얀 가루가 담긴 소포가 날아오는 유사 테러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초기조건의 과민함’은 국가보안법에서 비롯된다. 국보법이 없었다면, 강 교수의 글은 지금 그것이 가진 그 막강한 존재감을 갖지 못했을 게다. 국보법만 아니었다면, 우익 단체에서 강 교수를 고발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불러온 그 엄청난 이념적 해프닝들은 존재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러니 국보법이 있는 한, 앞으로 나비는 날갯짓도 맘놓고 못할 판이다.
마셜 맥루언은 1930년대 소련의 숙청작업을 바라보며 서구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에 대해 얘기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게 법적 처벌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서구사회에는 충격이었다는 거다. 이는 서구와 소련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차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오래전부터 문자문화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반면, 소련 사람들의 의식에는 아직도 구술문화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강정구 교수 파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도 역시 구술문화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술문화적 사고방식의 특성은 논리적, 추론적이라기보다 정서적, 격정적이라는 데에 있다. 강 교수의 글을 읽고 동의가 안 되면 그저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강 교수에게 쏟아진 것은 합리적 개인들의 차분한 반론이 아니었다. 흥분한 집단이 퍼붓는 격정적 분노였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군중은 쉽게 흥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것은 경우가 좀 다르다. 가령 이번에 검찰에서는 인터넷 폴에서 강 교수에 대한 네티즌들의 구속수사 주장이 70%에 달한다는 사실을, 구속을 해야 할 사유 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구속이냐. 구속수사 자체가 이미 징벌적 성격을 가진다 할 때, 사법적 처벌이 법논리가 아니라 국민정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얼마나 황당한가?
세상을 흑백의 이분법으로 보는 것도 구술문화의 특성. 이런 문화에선 ‘강 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그의 구속에는 반대한다’는 주장은 설자리를 잃는다. “6·25가 통일전쟁”이라는 강 교수의 주장은 한국전쟁의 성격에 관한 역사학적 명제이며, “강 교수의 구속에 반대한다”는 것은 피의자의 인권에 관한 법률론적 주장이다. 이 둘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구술문화 특유의 ‘국민정서법’에 이런 섬세한 구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강 교수의 구속에 반대하는 것은 곧 그의 주장에 찬동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반국가행위가 되었다. 한나라당이 벌이는 이른바 ‘구국운동’은 정확히 이런 원시적 논리 위에 서 있다. 강교수의 구속수사에 반대하는 것은 곧 그의 사상에 찬동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부에서 강 교수의 사상에 찬동하니, 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논리적 비약을 보라.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정구 파동은 정치적 사건이기 이전에 문화적 사건이기도 하다. 색깔론이라는 이념공세는 그 자체가 후진적인 정치현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의 의식을 일거에 문자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는 문화적 폭거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수구정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원시적 승리에 어떤 ‘문화적 퇴행’이 동반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