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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김영하(소설가) 2005-11-04

전국에 문예창작과가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목소리 큰 선생과 분필만 있으면 돼서 그랬을까. 하여튼 많이 생겼다. 이 문예창작과는 말할 것도 없이 문예물을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학생들은 매 학기 소설이나 시를 써야 한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작품을 쓰도록 독려한다. “써라, 써라, 써라.” 계속되는 독려에 많은 학생들이 오히려 문학에 흥미를 잃는다. 잘 하던 짓도 누가 시키면 그때부터 하기 싫어지는 게 인간이다. 반대로, 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예로부터 금서처럼 인기있는 책은 없었다. 읽지 말라면 더 읽고 싶고, 쓰지 말라면 더 쓰고 싶다. 그렇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겐 권장이 아니라 금지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혹, 이런 방식은 어떨까.

우선 문창과 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 집어넣는다. 학년에 따라 쓸 수 있는 글의 종류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예를 들어 1학년은 절대로 단편소설을 쓰면 안 된다. 만약 단편소설을 쓰다 적발되면 바로 집합이다. 선배들은 침대 밑에 숨겨둔 원고를 꺼내 후배의 면전에 들이밀며 다그친다.

“너 이거 단편 아니야?”

“아니에요. 그건 제 일기에요.”

“뻥까고 있네. 야 임마! 무슨 일기가 3인칭이야, 엉? 어쭈… 자세히 보니 플롯도 있고 분량도 80매인 게 수상쩍은데? 야, 우리가 단편하고 일기도 구별 못할 줄 알아? 엎드려뻗쳐. 1학년이 감히 단편을 써?”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쓸게요.”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창작열은 기이하게 불타오른다. 어떤 1학년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남몰래 단편을 쓰고 어떤 2학년은 방학을 틈타 장편소설을 끝낼 것이다. 1학년이 신춘문예에라도 당선되면 학교는 학생을 제적시킨다. 졸업장과 바꾼 한편의 소설, 이 얼마나 비장한가. 감방에서 문학사의 걸작이 많이 나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최근에 독서 교육에 관한 심포지엄이 많이 열리는데 늘 뻔한 소리다. 독서자격증(?)을 주자느니 독서감상문을 쓰게 하자느니 하는, 속보이는 권장의 술책뿐이다. 나는 정말 독서를 장려하고 싶으면 차라리 금지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단 웬만한 현대소설은 다 금서로 정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도 빼버리고, 물론 수능에도 출제하지 않는다. 가방 검사에서 나오면 당장 정학이다(이건 진담인데, 나는 교육당국이 부디 내 소설 모두를 금서로 지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없던 아우라도 홀연 생겨날 것이다).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교환하며 은밀히 금서들을 돌려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킬 것이다. 금서를 읽는 학생들은 학교의 스타가 되고 그 용감함으로 뭇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갑자기 소설은, 논술 대비용 참고 도서에서 인생을 건 모험으로 승격될 것이다. <B사감과 러브레터>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여선생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욕설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로 금서다. 말이 안 돼도 좋다. 하여간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무조건 금서로 지정한다. 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선생님 눈을 피해 야금야금 금서를 훔쳐보는 시간!

그러나 나의 이런 실없는 상상이 실현될 리는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 지루하고 계몽적인 권장의 술책 말고는 대안이 없단 말인가. 터부가 사라진 사회, 뭘 해도 불온하지 않은 세상, 쓸 수 없는 것이 없고 읽지 못할 것이 없는 사회, 읽고 쓰기를 한없이 권장하는 사회, 그런데도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신이 안 나는 사회. 그게 요즘의 우리 모습이다. “문창과 학생인데요.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잘 써지지가 않아요”라며 조언을 구하는 독자에게 “선생들이 싫어할 글을 쓰세요. 그러면 아주 신나게 써질 겁니다”라고 말해주었는데, 말해놓고 보니 뜨끔했다. 어떻게든 우리는, 좀더 불온해질 필요가 있다. 가끔은 대숲에라도 나가 외쳐야 하는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