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래의 키워드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문화의 콘텐츠를 선도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제조업이라는 문명의 뼈대가 구축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콘텐츠와 제조업 사이에 상호연관성의 방향과 강도가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70년대 이후 세계 제조업에서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면서 내세운 컨셉은 이른바 ‘경박단소’(輕薄短小)다.
가볍게! 얇게! 짧게! 작게!
이 발상의 전환, 상상력의 전복이 가져온 결과는 놀랍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 제너럴 모터스의 육중한 군용트럭 이미지는 이 한방에 무너졌다. 세계는 그 대신 일본식 경박단소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뉴욕에서 두바이에 이르기까지, 스톡홀름에서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일제 상품으로 넘쳐났다. 일제 전기-전자제품과 자동차가 세계를 공습해댔다. 품질이 뒷받침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에 높은 시장점유율까지 확보했으니 두려움이 없어질 법도 하다. 일본에서 ‘불침항모론’(일본을 결코 침몰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비유한 표현)이 겁도 없이 튀어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제조업이 일본의 간판산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덩치가 크면 뭔가 달라진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은 인구 1억수천만명이라는 독자적인 내수기반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수십년 제조업의 활황 속에서 일본은 나름의 콘텐츠 산업을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 일본의 콘텐츠 천재들은 대충 두 가지 길로 간 것 같다. 하나는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게임이다. 젊어서 좌익운동을 하던 세대들이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한 뒤 찾아낸 출구가 만화다. 만화는 창작자에게 상상력의 공간만 주어지면 된다. 할리우드식 영화와 달리 엄청난 자금과 전세계적인 배급망이 없어도 된다. 그저 만화의 천재라면 자신의 상상력을, 작지만 가독성 높은 만화책의 지면에 폭발시켜버리면 된다. 24시간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과 뜻이 맞는 스토리텔러, 라면과 담배와 캔맥주… 뭐 그 정도면 된다. 책이 나오면 일본 전역을 거미줄처럼 잇는 유통망에서 알아서 처리한다. 수천만 샐러리맨을 집에서 생산현장으로, 생산현장에서 다시 집으로 매일처럼 실어나르는 거대 지하철망에 실어보내도 좋고, 자전거와 맨몸으로 중간유통점에서 가판대까지 실어나르는 제3국인의 어깨에 의지해도 좋다. 천재는 그저 그리기만 하면 된다. 신세대의 천재도 저마다 만화의 엘도라도(황금의 땅)로 진출해간다. 작품만 좋다면 명성과 함께 일확천금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권당 수십만씩 팔리는데다가 빅히트작 치고 수십권짜리 시리즈 아닌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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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 <올드보이>를 바탕으로 이룩해낸 한국영화 <올드보이>의 대성공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만화와 일본영화의 불균형 발전 때문에 가능했다. 쉬운 얘기로 일본의 콘텐츠 천재들이 만화로 몰려간 반면 영화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만화 천재들의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영화 천재들이 부족했다. 게다가 영화산업의 자본과 유통은 어쭙잖게 다른 일본 내수상품처럼 과거의 틀을 한껏 흉내내고 있었다.
그 틈을 치고 들어가서 한국의 영화천재들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콘텐츠의 천재들이 영화와 게임으로 밀려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만화가 한국영화와 굳건한 전략적 혈맹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들도 본다.
“그래? 한국애들이 그렇게 잘했어? 하지만 이제부턴 수십년 경쟁과 축적 속에서 이룩한 콘텐츠의 보고인 우리 만화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길 수는 없지.”
상상력의 측면에서만 볼 때 만화와 영화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만화적 상상력의 공간을 영화적 상상력의 공간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무겁고 느리다. 육식공룡 앞의 초식공룡이랄까? 이제 만화는 콘텐츠라는 장르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잠재력이 큰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거기서 영화가 나오고 게임도 나올 것이다. 캐릭터가 되고 팬시상품이 될 것이다. 만화는 콘텐츠 분야의 소재산업인 셈이다.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선 중장기적으로 만화산업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소재산업 없이 제조업은 내실있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일본이 제조업에서 막강한 소재산업의 경쟁력으로 소리소문없이 한국으로부터 엄청난 무역흑자를 빼가는 현실을 잊었는가? 진정한 영화산업의 전략가라면 지금 만화의 상상력에 투자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