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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로 프린트가 뭉턱 잘려 2권만 돌아오더라 ”
2001-08-01

이영일이 만난 일제시대 영화인 3 - 이필우(2)

+ <흐르는 사람들>등, 총독부의 극심한 가위질로 영화들 개봉이 좌초되다

<장화홍련전>이 끝났을 때 마침, 연극 연출가 현철씨와 이구영 감독이 조선배우학교를 만들었다. 나는 그 건물 안채를 빌려 현상실을 만들어놓았고 현철씨는 바깥채에서 배우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나는 단성사를 들락날락하면서 영화를 준비했는데 단성사에서 돈을 대주지 않아 현철씨와 손을 잡았다. 돌아가신 양반 평해서 안 됐지만도, 이 양반이 아주 잔 양반이 돼서 거기서도 당최 용돈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고려영화제작소다.

이때 일본에서 전보가 들어왔다. <만슈노 무스메>(滿洲の婦: 만주의 처)를 박으려 하는데 한국 여배우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개를 해줄 테니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도오. 한국의 대작으로 <심청전>을 해야겠는데, 기계가 없으니 빌려달라.” 이것이 내 조건이었다. 우리에겐 라이트도 없었고, 용궁을 박을 기계도 없었다.

약속은 해놓았는데, 예쁜 만주 여자 될 감이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혜숙은 안 되고 이월화밖에 없었는데 이월화는 내가 알지 못했다. 마침 백남이(윤백남. <월하의 맹서> 등의 감독- 필자) 하고 부산서 사진을 백인다는(당시에는 영화촬영을 ‘영화를 박인다’ 혹은 ‘사진을 박인다’라고 표현했다.- 필자) 소리를 듣고 쫓아내려가 승낙을 받아냈다. 그래서 일본에 사진을 보냈는데 거기서 “키가 너무 작고 엉덩판이 너무 굵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래 난주라는 기생을 하나 구해다 일본으로 들여보냈다.

<심청전> 준비를 잔뜩 하고 있는데, 백남이가 올라와서 자기들도 <심청전>을 백이고 있다고 야단을 했다. 한 작품을 놓고 경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쌍옥루>를 시작하게 됐다. 여배우는 기생으로 있던 김소진이를 하루 화대 10원에 교섭해 데려다 쓰고, 김삼화 아버지(김택윤- 필자)를 상대역으로 만들었다. 해안가장면이 있어서 인천 월미도로 내려가 영화를 백였다. 그런데 이 김삼화 아버지가 하얀 양복에 줄을 빳빳이 세워 입고는 구부리라고 해도 구부리지 않으면서 연기를 했다. 자기 자식이 죽어서 물 속에서 건져올리는 장면에서도 요렇게 앉아서 연극을 하니 속이 터졌다.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이 제일이지 말야! 화가 나서 그때 낚시꾼으로 나온 배우 강홍식이가 그걸 데려다 후려갈겼다. 다 촬영해 올라온 것이 열여섯권 장편으로, 사진이 길게 나와서 단성사에서도 좋아하고 그랬지만, 손님이 썩 많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무난히 <쌍옥루>를 끝냈지만 백남이가 한 <심청전>은 흥행에서 골탕을 먹었다. <심청전>은 어째 그런지 당최 흥행이 안 된다. 연극을 하든지 뭘 하든지 시방에도 그렇다. 후에 안석영씨하고 맨든 <심청전>(발성영화로 만들어진 1937년 작품- 필자)도 마찬가지다. 발성 <심청전>은 일본서도 보고 탄복을 할 정도로 참 영화 좋았는데 흥행은 안 됐다.

배우 혹사시키는 나운규에 대한 원성 높아

하루는 아는 일본 친구가 천진서 와서는 촬영기계를 사라고 했다. 삼백원이면 사는 기계라는데 가져다 놓고 보니 아휴, 이게 한 삼십년 전 식 기계였다. 고몽 거였다. 갖다 백여보니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삼백원에서 이백원을 깎아 백원에 사가지고 <멍텅구리>를 찍었다.<멍텅구리>라는 것은 <조선일보> 연재만화가 원작이다. 이게 하루에 한 토막씩밖에 신문에 실리지 않으니 잘못했다가는 스라이트(슬라이드- 필자) 맨드는 식이 되게 생겼다. ‘어떻게 영화로 이야기를 연결시키는가?’ 이런 테크닉은 내게도 없었다. 그때는 연극 무대에서도 배우들이 각본없이 연기할 때였다. 그래도 그때는 ‘좀 웃겨보자, 너무 우울한 사회고, 매일 누가 잽혀갔다는 소리뿐이니 좀 풍자를 해보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결국 <멍텅구리>는 실패봤는데, 실패는 어디서 했는고 하니 이놈의 기계가 자꾸 고장이 났다. 필름이 감아져야 말이지! 촬영하다 말고 배우들 모두 돌려보내고 집에 가지고 가서 현상실에서 빼보고, 이튿날 또 그 장소에 가서 백이고 그러는데 이번에는 전날 쌓여 있던 눈이 녹아버렸다. 떡 백여놓고 보니 사진은 엉망이고, 나는 부끄러워 극장에 가지도 않았다. 희극이라고 하면 줄거리가 희극이어야 될 텐데, 배우가 희극이 돼버리니. 그 무렵에 <아리랑>이 나오고 그랬다.

<멍텅구리> 끝나고 다음에 한 영화들 중에서는 빛을 못 본 것이 많다. 이것이 오까라는, 검열부에 있던 놈과 싸우는 원인이 된다. <낙원을 찾는 무리들> <혈마>, 모두 이놈이 가위질을 했다. 이놈이 나운규하고 친했는데, <아리랑>이 아마 그래서 나왔지 싶다.

<낙원을 찾는 무리들>은 스토리가, 우리끼리 뫼서 새 낙원을 만들어야 된다, 그런 내용인데, 검열 들어가니까 재깍재깍 잘라내버렸다. 을지로4가 냇가장면에다 왔다갔다 하는 산 송사리를 오바라쿠(오버랩- 필자)해놨더니 죄 끊어버리고, 또 여자 우에다 돈을 뿌리는 게 있는데 그것도 죄 끊어버리고. 느들 빨갱이 아니냐, 불온하다 말야, 그러면서 말야. 여덟권을 백여놓았는데 검열 들어갔다 나오니까 네권밖에 안 남았다. 이 각본은 황운이가 썼다. 본래 함흥이 고향인데, 허리우트(할리우드- 필자)에 가서 한 이태 동안 감독연습을 하고 왔다는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배우들은 남궁운, 임운학, 그리고 조선키네마사(1926년 일본인 요도가 만든 제작사로 나운규의 <아리랑> <풍운아>가 모두 여기서 제작되었다.- 필자)에 운규하고 있다가 갈려나온 친구들이 모두 출연을 했다.

조선키네마사가 분열이 된 이유는 같이 영화를 하면서 운규가 인심을 잃은 데 있다. “남이 연기해 놓으면 살짝 나와서 전부 자기가 한 모양 토르륵 말어가지고 자기만 살고 나간다. 그럼 우린 뭐냐?” 이러고 싸움들이 붙었다. 운규는 배우가 각본을 보여달라고 하면 없다 그러고, 꼭 줘야 할 때는 요만한 종이에 몇자 적어서 끼고 있다가 두 손가락으로 꺼내면서 “요거요” 이 짓이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허니?” 그러면 “하라는 대로만 해요” 그러고. 내가 하루는 운규네 촬영하는 걸 나가봤다. 각본에 ‘가라’ 그러는데 이게 어떻게 해서 가라는 건지, 달음박질쳐 나가는 건지, 겨가는 건지, 연기허는 사람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고. 그러니 실컷 남 연기 시켜놓고 자기만 산다고 반감이 났다.

“얼굴 나오면 안된다”고 여배우는 찔찔 울고

이때나 저때나 문제는 여배우다. 누굴 쓰느냐 끙끙 앓고 있는데 주인규(<아리랑>에서 지주 집 마름 오기호 역을 맡았던 배우- 필자)의 애인이 소개를 해서 이화대학에서 여자를 하나 뽑아가지고 왔다. 보니까 괜찮은데, 한 삼일 백이고 나니 촬영을 나가재도 나가지 않고 찔찔 울고 있다. 만나서 얘길했더니, 영화 나가는 걸 학교서 알면 퇴학이고 집에서 알면 겨난다고. “영화를 백여도 내 얼굴은 뵈지 않게 한다고 해서 왔어요. 사흘 백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벌써 열흘이나 백이고 있으니 어떡합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서 모두 모아놓고 결정을 했다. “남자도 영화 한대면 집에서 난봉꾼으로 내기는데, 여자가 학교에서 안 겨나겠느냐. 우리 필름 사백자는 손해보자. 차라리 여배우를 바꾸자.” 그렇지만 여배우가 어디 있는가,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전옥이었다. 함흥에 전보를 쳐서 이틀 만에 전옥(신파극계에서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으며 <낙원을 찾는 무리들>로 데뷔. 촬영차 함흥에 내려갔던 이필우에게 배우 지망의 뜻을 밝힌 인연이 있었다- 필자)이를 올라오게 했다.

<혈마>는 원산만 프로덕션에서 일을 하다가 백인 작품이다. 하루는 대굴 내려갔더니 김영섭이라고 대구서 여관하는 사람의 아들인데, “사진 하나 백일 게 있는데, 그걸 백이겠는가?”해서 시작하게 됐다. 김영섭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은 홍개명이, 출연은 일본 아시마 프로덕션에서 감독을 지낸 이력이 있는 유봉렬이를 시켰다. 그렇게 해서 완성을 했는데, 이것이 실화가 아니냐고 총독부 검열관 오까 하고 시비가 붙었다. 그 내용은 소작인의 딸을 에…, 먹은 거지. 먹긴 실컷 먹다가 어린앨 낳고 그러니까 사회적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여자를 자기 집 사무원한테 주는 그런 스토리다. 촬영 당시에 그 사람들이 전부 살아 있었다. 결국 돈만 없어지고 개봉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개봉을 못하고 썩은 작품으로 <흐르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극장에 있을 땐데, 감독 이규설이가 사진을 하나 백여야 되겠다고 스토리를 가지고 왔다. “이거는 우리 한국사람이 북간도 가서 고생하는 사진이요.” 일본놈한테 다 뺏기고 간도로 갔는데, 간도 갔더니 또 중국놈들한테 당하더라는 얘기다. “합시다” 그래 백였는데 또 검열 걸리잖아. 다 잘라내고 두권 남겨놨으니 흥행도 못했다.

이제 할 수 없어서 상해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경손씨(이경손. <해의 비곡> 등의 감독. 전창근과 함께 상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영화인으로 1932년 그곳에서 <양자강>을 감독했다.- 필자) 하고 마침 뜻이 맞았는데, 그이는 나가사키를 돌아서 가고, 나는 대련으로 해서 들어갔다. 가서 있은 곳이 대중화백합영편공사(大中華百合影片公司)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