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아니라, 정지훈이란다. “연기를 시작할 때 비는 딴 데 묻어두고 온다”고 말할 땐, 크지 않은 눈에 힘이 들어간다.
비의, 아니 정지훈의 모습이 달라졌다. 1집 음반 <나쁜 남자>로 데뷔한 게 2002년, 연예계 생활 3년 반이다.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로 연기를 시작한 지는 벌써 꽉찬 2년이다.
데뷔 초기, 정지훈은 천진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잘 빠진 날렵한 몸매와 구릿빛 근육, 순박하게 입을 찢는 미소, 현란한 춤 솜씨의 어우러짐은 순식간에 팬들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어느덧 동아시아 지역 투어를 벌여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은 대스타로 발돋움했다. 두번째 드라마 <풀하우스>는 그를 연기자 정지훈으로 각인시키는 구실을 했다. 이래저래 가수에, 연기자에 팔방미인 한류 스타다.
완벽한 연기자 변신위해 코피쏟을 정도로 고된 연습 감정 잡느라 다리도 후들거려 오늘도 밤을 샌다
그래서일까, 정지훈은 어떤 강박에 사로잡힌 듯했다. 25일 열린 한국방송 새 월화드라마 <이 죽일 놈의 사랑> 제작발표회에 자리한 그는 시종일관 긴장한 표정이었다. 뭔가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이랄까.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한마디가 많은 걸 설명했다. 연기자가 아니면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는 비밀 같은 일. 그는 정지훈과 ‘강복구’ 사이를 정처없이 오가는 모양이다.
다섯살 때 부모를 잃고 형과 고아원에서 자란, 어릴 때부터 나쁜 짓은 죄다 하고 다닌 동네 양아치, 자신의 죄를 뒤집어 쓴 형이 소년원에 가자 철이 든, 강복구다. 식물인간이 된 형의 복수를 위해 여배우 차은석의 보디가드가 된 강복구는 원수라 여기는 여성에게 ‘치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이 죽일 놈의 사랑’이다. 거칠고 황폐한 밑바닥 인생의 주인공 강복구의 표정이 밝을 리 없다.
이경희 작가의 설명에서 정지훈의 어두운 표정의 실마리가 얼핏 잡힌다. “테크닉이 아닌 가슴으로 연기하는 보물 같은 배우”라고 정지훈을 추어올린다. 차은석을 맡은 신민아도 가세한다. “가수라는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집중력이 무서우리만치 대단한 연기자”라는 설명이다.
“요즘은 평소에 내가 건방져지고 싸가지 없어진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캐릭터에 빠져 있나봐요. 내가 가슴이 아파요. 저도 제가 무슨 연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지훈의 덧붙임이 그가 살고 있는 “처참하고 지독하고 불쌍한 남자” 강복구를 짐작케 한다. “감정 신이 워낙 많아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강복구에 푹 빠져, 이미 강복구처럼 보이는 정지훈의 분위기가 90%는 와닿는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린 시절 가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던 아픔과 가수 박진영의 백댄서로 고된 음악 수업을 받던 중 돌아가셨던 어머니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기억 등, 데뷔 초기 털어놓았던 정지훈의 개인적 상처와 아픔들이 강복구의 모습과 겹쳐진다. 연기에 나섰던 그 많은 가수들 가운데 유독 정지훈이 찬란히 빛나는 것도, 그가 부딪히며 겪어온 삶의 무게 덕분이 아닐까.
“밤잠을 자다 코피를 쏟을 정도로, 이종격투기 연습에 고된 시간을 보낸” 정지훈은 드라마 연습이 끝난 뒤에도 바로 안무 연습실로 달려가고, 영어·일어·중국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서른살 이후엔 사업을 하겠다”는 꿈이 있기에, “다가온 큰 기회에 무조건 밀어붙이고 밤을 새우더라도 무리하더라도” 하고 있다.
“머리에 많은 것을 쌓은 뒤에는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의 진정성이 인간 정지훈의 앞날을 가늠할 잣대임에 틀림없다.
절망의 나락에서 만난 치명적 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 어떤 드라마?
“과연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만한 것인가?”
31일부터 방송될 월화드라마 <이 죽일 놈의 사랑>의 이경희 작가가 내놓은 화두다. “사랑의 어둠과 슬픔, 돌을 맞아죽을 정도까지 치닫는 사랑”에 대해 말할 거라고 했다. 이 작가의 전작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인물 구도와 분위기 등도 흡사하다. 처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천착하는 작가적 고민의 결과일 터다.
역시 <이 죽일 놈의 사랑>도 슬프지만 신파가 아니고 웃음이 나오지만 코믹 멜로가 아니다. 인간의 숙명에 맞닿아 있는 사랑이야기다. 그래서 드라마 톤은 거칠지만 아련하고, 슬프지만 잔잔하고, 무겁지만 가볍다.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분위기가 탄탄하게 짜인 구성과 어우러져 드라마의 완성도를 이뤄낼 듯하다. 제작발표회에서 미리 선보인 장면들에서는 깔끔한 영상미가 시선을 잡았다.
연기자들도 근래에 드물게 화려하다. 정지훈·신민아가 주인공을 맡고, 김사랑과 신인 김기우가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됐다.
주인공 강복구는 형이 좋아하던 차은석에게 버림받아 자살 기도를 해 식물인간이 됐다고 여기고 차은석에게 접근한다. 신민아가 연기하는 차은석은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스타 연예인이 됐고, 아버지와 새엄마, 친동생과 배다른 동생들은 그를 ‘봉’으로만 본다. 이종격투기 선수로 자학하며 험하게 살아온 강복구는 복수를 하겠다며 차은석의 매니저로 들어간다. 그러나 차은석의 맑고 순수한 모습에 빠져들며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한다.
파격적인 연기 변신에 나선 김사랑은 한다정 역을 맡았다. 생김새와 달리 그악하고 드센 한다정은 시장 사람들에게 일수를 놓고 실내 포장마차를 하는 억척이다. 목적은 단 하나, 강복구를 위해서다. 김기우가 연기하는 재벌2세 김준성은 실수로 차은석과 맺어진다. 그러나 점점 사랑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