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도 하고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책 읽기 좋아 독서의 계절이라는 사람도 있고, 독서 말고도 즐길 수 있는 게 너무도 많은, 좋디좋은 계절이라 책읽기를 권장하기 위해 독서의 계절이라고 억지를 쓰는 거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쪽이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거리로 나온 책들과 더불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제1회 와우북페스티벌이 9월30일부터 10월3일까지 홍대 앞에서 열렸으니 말이다. 홍대 앞 주차장거리에 책 할인판매 부스가 출판사별로 50개도 넘게 설치되었고, 이곳에서는 20%에서 50% 할인된 가격에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많은 책들이 판매되었다. 홍대 앞 작은 카페나 술집에서는 시 낭송회나 소설가의 낭독회, 독자와의 대화 행사가 열렸고, 소극장 무대에서는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이 공연되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폭우에 아랑곳않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따뜻하고 의미있는 행사가 줄이은, 제1회 와우북페스티벌 4일간의 추억을 <씨네21>이 재구성해 보았다.
인터넷 서점과 e-book의 등장은 책장을 넘겨보고 책을 고르는 재미와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한아름 사 든 책을 들고 집까지 가야 하는 고난을 없애주었다. 하지만 책과 책을 둘러싼 모든 것의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홍대 주차장 골목에 늘어선 ‘와우북페스티벌’의 길거리 부스는 호사스런 고통이었다. 50곳도 넘는 출판사들의 이름이 걸린 부스들은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한 20%~50% 할인행사를 벌였고, 개중에는 작가의 사인회를 연 곳도 있었다. 책을 한아름 손에 들고도 1천원의 가격이 붙은 책들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책 저책 사달라고 부산을 떠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책구경은 시작도 못한 부모들도 있었다.
폭우, 그러나 축제는 계속된다
제1회 와우북페스티벌은 ‘거리로 나온 책, 함께 읽는 책, 우리가 쓰는 책’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열렸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도 값진 게 많았지만, 이제 막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책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는 많은 행사가 마련된 것이 와우북페스티벌의 강점이었다. 직접 책을 만들어볼 수 있는 ‘책 만드는 버스’에서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만들기에 골몰한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고무판에 그림을 새겨 티셔츠에 찍어내는 판화 티셔츠 만들기 역시 마찬가지. 특히 한국씨니어연합이 참여한 ‘할머니가 읽어주는 책’ 행사는 어린 아이들이 할머니가 책을 읽어주고, 종이접기와 같은 놀이를 가르치면서 세대간의 유대를 이끌어냈다.
좋아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사도 줄을 이었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에서 길게 줄을 서서 책에 사인을 받는 것으로는 작가와 그의 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원한 가을 오후의 바 야외석이나 아늑한 카페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페스티벌 초반에는 가을답지 않은 폭우가 내려 많은 사람들의 발을 묶어놓았지만, 날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소설가 윤대녕의 ‘독자와의 만남’에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리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서 한 세계여행과 NGO 활동으로 잘 알려진 한비야의 ‘독자와의 만남’에는 10년 전부터 그녀의 책을 읽어온 독자들이 행사장 마당을 가득 메웠다.
어머니가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자락을 사각사각 스치며 걷던 시절, 아버지가 셔츠 단추를 두개쯤 푼 교복에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멋을 부리던 시절에 ‘문학의 밤’이라는 게 있었다고 했다. ‘문학의 밤’에 대해 들은 말은 많지만 내가 결론내리기로 ‘문학의 밤’은, 학교 강당 같은 곳에서 열리던 행사로, 자기가 쓴 시를 낭송하면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흘끗거리고 쳐다보는 그런 행사였다. 섹시댄스를 추며 댄스배틀을 하는 ‘노골적’ 구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세대로서는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던 그 행사의 낭만을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와우북페스티벌 중에 있었다. 시인이,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읽고 독자들과 그 감흥을 나누는 행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작가들의 낭독도 듣고, 공연도 보고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올린 <이사> 공연 전에, <이사>의 초반을 직접 낭독했다.
‘낭독의 밤’ 행사가 있었던 9월30일에는 개와 고양이가 싸우듯 비가 쏟아졌다. 오후 7시로 예정되었던 행사에는 발걸음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최근,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펴낸 시인 장석남과 단편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발표한 소설가 김경욱이 카페 이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낭독을 할 주인공들이 앉은 자리를 제외한 객석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두 주인공은 서로의 책을 탐독하다 빗물을 떨구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끔 쳐다보았다. “원래 읽기로 한 시가 있었지만, 날이 궂고 장마처럼 비가 내리니 ‘장마’라는 시를 읽겠습니다”라며 장석남이 먼저 시를 낭송했다. 곧이어 김경욱이 <장국영이 죽었다고?> 중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의 도입부를 읽어내려갔다. 낭독 뒤, 박수가 터지기 전에 잠깐씩 침묵이 흐르는 것은 그 자리를 찾은 손님 중 책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고, 낭독의 자리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진행을 맡은 우찬제 서강대 교수의 원활한 진행 덕분에 초반의 어색함이 가시자, 시인과 소설가는 서로의 작품 중에 인상깊었던 구절을 이야기하거나, 작품은 작가의 경험을 얼마나 반영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나의 작품은 내 얘기가 아니지만, 당신의 작품은 당신 얘기 같군요” 하는 식으로.
문학 작품이 다른 예술 표현 방식과 소통하는 법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들도 있었다. 10월1일, 포스트 극장에서 있었던 연극 <이사> 공연은, 김영하의 단편소설을 극화해 무대에 올린 것. 연극 공연 전, 소설가 김영하가 무대에 나와 단편 <이사> 낭독을 했다. 이사 전날 밤까지의 이야기를 김영하가 먼저 읽고난 뒤 연극이 이어졌다. 김영하가 읽은 대목과 겹치는 부분부터 연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편을 미리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극화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빈 자리 없이 빼곡 들어찬 관객들은 연극이 끝난 뒤 ‘연출자·작가와의 대화’ 시간에도 열의를 보였다. 소설 창작에 관심있는 관객들의 질문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장르의 작품을 쓸 때는 장르마다 장소를 달리해서 써보세요” “쓰고싶은 것, 남들이 쓰지 말라는 금지된 것들을 써보세요.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은 글을 쓰세요”라는 김영하의 실용적인 충고가 줄을 이었다.
연극 <이사>는 소설과 연극이라는 비교적 그 유사성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을 택했지만, 10월3일 카페 이리에서 있었던 ‘시놀이-새로운 시읽기’는 시와 음악의 접점을 찾는, 이 대목과 저 대목을 연결짓기 녹록치 않은 퍼포먼스였다. 게스트로 나온 시인 함성호가 즉흥시를 문자메시지로 관객들에게 보내면 메시지를 받은 관객이 받은 그 내용을 낭독하는 식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고통은 나눠가지면 나눠가질수록 배가 되니, 입 다물고 혼자 놀기”하는 식. 곧이어 나온 시인 함민복은 즉흥적으로 전화를 해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으나, 현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얼마나 경계심을 갖는가의 문제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저는 함민복이라고,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제가 쓴 시를 읽어드려도 될까요?”-“지금은 바쁜데 나중에 전화주시면 안 될까요?”). 함민복이 시를 읊으면 기타리스트 방준석이 음악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는데, 시가 갖는 느낌이 소리로, 악기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를 음악으로 표현한 뒤, 시인은 그 음악이 어떤 시를 나타내는지 맞출 수 있을까? 시인은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즉흥시를 쓸 수 있을까? 불발로 끝난 시도도 있지만 시가 탄생하는 과정, 그리고 시가 음악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시인 함성호는 즉흥시를 문자메시지로 관객에게 보내면 메시지를 받은 관객이 그 내용을 낭독하는 식으로 ‘시놀이-새로운 시읽기’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까페 빵에서는 9월30일과 10월2일 이틀에 걸쳐 ‘내 음악에 담긴 책’이라는 공연이 열렸다. 10월2일 공연에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값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메인스트림의 스타에 가까운 인디 뮤지션들이 아닌, 자신의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낯선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인상깊게 읽은 책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여자 보컬 ‘흐른’의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노래는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로 끝나는 최승자의 시 ‘삼십세’로 이어졌다. 네 번째 공연자였던 ‘라라뱅스’는 부산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세 부산 아가씨들로 이루어진 그룹. ‘라라뱅스’는 시종일관 쾌활했던 공연만큼 유쾌하기로 소문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