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요란을 떨어 지나던 길에 복구된 청계천에 들러보았다. 유체역학적으로 계산해야 할 것은 물의 흐름이 아니라 사람의 파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 틈에서 새치기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겨우 틈을 얻어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몰려든 인파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렇지, 도심에서 개울을 본다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내가 본 청계천은 ‘생태복원’이나 ‘문화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계천이 돌아왔다’고 하기보다는 청계천 자리에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분수가 하나 생겼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거대한 콘크리트덩이 속에 가냘픈 물길이라도 생겼다는 게 어디인가? 민초는 어차피 생태적, 문화적 마인드를 갖기에는 삶이 너무 고달프다.
청계천과 더불어 이명박 시장의 몸값이 치솟는 모양이다. 이명박 시장이 대선 후보로서 박근혜 대표를 앞섰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박 대표는 보수층 사이에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후광을 얻고 있지만, 그 후광도 이명박 시장 앞에서는 빛이 바랜다. 왜? 두 사람을 비교해볼 때, 정작 박정희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박근혜 대표가 아니라 외려 이명박 시장쪽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향수의 본질은 고도성장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 나라가 계속 고도성장을 한다는 것은 아직 그 나라가 개발도상국의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처럼 압축성장을 한 나라에서는 고도성장을 하던 시절이 과거가 아니라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가깝다. 그리하여 지금도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고, 경제가 안 풀릴 때마다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의 향수는 더 짙어진다.
누가 이 향수를 달래줄 것인가? 역시 이명박 시장이다. 그는 현대 정주영 회장 밑에서 ‘고도성장’의 신화를 만들어왔던 인물이다. 청계천 공사는 잊혀져가던 그 신화를 시각적으로 되살려냈다. 남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서울 시민이 낸 세금으로 실현한 사업이지만, 봉건적 송덕비의 문화 속에서 그 공은 온전히 이명박 시장의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의 공이 온전히 박정희에게 돌아가듯이 말이다.
다스린다는 뜻의 ‘치’(治) 자에는 물 수(水)자가 들어 있다. 예로부터 물을 다스리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명박 시장은 몸으로써 이 동양의 고전을 리바이벌하고 있다. 청계천 물은 일단 한나라당 내 대선 후보 경선용으로 활용하고, 그 효과가 잊혀질 때를 대비해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바로 경부운하 건설의 원대한 꿈이다.
이 역시 박정희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의 기초를 닦는 것처럼, 자신은 경부운하를 파서 한국 경제의 고질병인 물류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이들이 오늘날 머쓱해진 경험이 있기에, 이명박의 경부운하 건설에 마냥 반대만 하려니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이미 몇년 전에 타당성이 없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 공사가 타당성이 있건 없건, 이명박 시장으로서는 손해날 것이 없다. 어차피 사업의 타당성 검토, 공사의 성패 여부, 경제적 효과의 산정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닌가. 나중에 결과야 어떻게 나오든, 선거전을 치르는 효과적 무기로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이명박 못지않은 개발주의자들이 아닌가.
IT산업의 발전 등 생산의 성격이 급속히 비(非)물질화하는 21세기에도 아날로그 ‘불도저’는 필요하다. 건설교통부에는 여전히 건설국장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다만 그 건설족 마인드가 건교부의 영역을 벗어나 나라 전체로 뻗어나가면, 이 땅에 사대군사노선이, 마침내 사대군사노선의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까? 전 하천의 인공화. 전 국토의 공사판화. 전 인민의 구경꾼화. 전 물주의 투기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