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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최초의 열정을 기억하고픈 까닭
오정연 2005-10-21

<씨네21>의 주간회의는 매주 수요일 밤에 진행된다. 다음주에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 그 기사는 누가 쓰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정하는 시간. 별다른 동요없이 (세상의 다른 모든 회의들처럼) 다소 지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회의는, 겉보기와 달리 제법 치열하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경쟁하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경쟁은 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차악을 향한 것이다. 특집·기획부터 인터뷰, 배우 기사, 개봉작 프리뷰 순으로 기사를 쓸 사람을 정해나가는 회의의 진행 순서를 고려하여, 몇수 앞을 내다본 누군가는 까다로운 기사를 쓰겠다고 자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혜안은 좀더 강력하게 까다로운 기사만이 남게 되는 몇분 뒤에 빛난다. 한주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놀 수 있는 경우는 없는 법, 그 어느 것에도 자원하지 않은 자는 뒤에 남겨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를 생각하며 후닥닥 숙제를 해치워버리던 열정, 벼르던 영화를 보기 위해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던 희열, 직장이든 학교든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정진하던 투지가 자취를 감춘 자리.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은 일보다는 웬만하면 피하고픈 일들이 많아졌다. 영화를 보고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누군가는 ‘아아니 공짜로 영화를 보고, 평소 좋아했던 영화인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일들을!’이라며 부러워할 만한 일도(아닌가? 아니면 말고. ㅡ.,ㅡ), 결국은 ‘일상적이고 직업적인’ 일일 뿐이기에 마찬가지다. 이는 반드시 특정 영화가 재미없거나, 특정 취재원에게 흥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상 너무 훌륭한 영화 혹은 인터뷰이를 접하고 나면 그 막막한 호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복장이 터지거나, “굳이 이걸 말로 표현해야 하나?”라는 개인적인 상념에 빠지게 되는 것을.

지난 주말에는 ‘평일에도 일삼아 영화를 보더니 주말마저 영화를 찾아보는, 근근한 취미생활 하나 마련하지 못한 신세’를 다소 한심해하며 필름포럼으로 영화를 보러갔다(도리가 없다. 영화기자가 되기 전에는 영화보기가 엄연한 취미생활이었던 것을).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는 무조건 봐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영화제 프리뷰를 위해 VHS를 줄창 봐야 하는 일정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4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를 집중하고 감동하며 관람한 뒤, 몇년 만에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 뿌듯했다. 최근에 있었던 주간회의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만나고픈 인터뷰이를 취재하겠다 살짝(?)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그 만남을 글로 옮기는 일이 전혀 별개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영화기자여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간만에 했던 것도 같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삶의 태도. 비단 영화주간지 기자만의 것은 아닐 이 서글픈 자세를 벗어나는 길은 결국, 가물가물해진 어떤 열정을 기억해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다. 한주 기사를 마감하고 내일(금요일)이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을 예정이다. 데일리팀으로 부산에 내려가 극장에서 영화를 단 세편(그중 두편은 비몽사몽간에)만을 볼 수 있었던 지난해의 암울한 기억이 떠오른다. 더이상 추억의 공간만으로 남을 수 없는 그곳. 그나마 주말 3일 중 하루는 또 다른 취재 및 마감으로 바빠야 하겠지만, 영화를 찾아 멀리 떠날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아득하게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