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억에 남는 특별한 영화라…. 영화와 연극을 전공한 나에게 그것이 어디 하나둘뿐이겠냐만은 굳이 지금 처해 있는 내 상황을 비쳐볼 땐 이거다 싶은 한편의 영화가 있긴 하다. <필라델피아>…, 아는 분은 다 알겠지만 이 영화는 동성애를 다룬 영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성애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이다. 그 수많은 영화 중에 왜 하필 이 영화냐, 홍석천씨 당신의 커밍아웃은 이제 모두가 다 알고 있어요, 이젠 동성애라는 말 지겨우니 그만하세요, 이럴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렇지만 어쩌랴. 내게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원고 청탁한 용감한 여기자의 의중을 내가 가뿐하게 눈치채버린걸. 사실 내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이 잘나가는 <씨네21>에 나올 수 있었겠나도 싶다. 솔직히 연기자인 나로선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하는 게 꿈이다. 이병헌, 송강호, 한석규…, 내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이 표지를 장식할 땐 그저 그런 느낌이었는데 나보다 한참 후배들의 사진을 볼 땐 솔직히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 옆길로 많이 샌 느낌이다.

아무튼 용감한 여기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몇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땐 솔직히 좀 졸았다. 톰 행크스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봤는데 그날 아마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기억나는 장면이 별로 없었다. 톰 행크스의 애인이 안토니오 반데라스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자마자 즉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극도로 힘들 때 비디오숍에서 망설이며, 결국 모자를 꾹 눌러쓰고 빌려본 <필라델피아>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였다. 직장에서 이른바 잘 나가는 행크스가 에이즈에 걸려 동료들에게 동성애자라는 게 발각돼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해고당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싸우는, 그래서 결국 승리하는, 그러나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는 가슴시린 휴먼드라마였던 것이다.

난 이 영화를 연체료를 감수하면서 세번을 봤다. 처음 톰 행크스가 변호사인 덴젤 워싱턴을 찾아간 날, 그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돌아서기 전 덴젤 워싱턴과 악수를 한다. 그리고 행크스가 나간 뒤 덴젤 워싱턴은 황급히 손을 씻는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편견 그리고 두려움.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사람들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얼마나 멀게 만드는지 느꼈고, 이내 아쉬워졌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곤 기어코 힘을 얻었다. 행크스가 수많은 변호사들을 만나 자신의 사건을 맡아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자 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던 장면이다. 그의 병색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하자 도서관 사서가 불편하면 따로 마련된 방으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물론 그의 속마음은, 이 더러운 것아 어서 일어나, 였겠지만. 행크스가, 내가 불편한 거보다 당신이 더 불편해서겠지요, 라고 말하는 대목이 왜 그리 아프게 다가오던지. 그 모습을 숨어서 보던 변호사 덴젤 워싱턴이 같이 싸워보겠노라 했던 것처럼 나도 자신있고 당당하게 거리로 나가자 했다. 내 스스로에게 말이다. 걷다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피가 나도, 누군가 뒤에서 수군대는 말들에 숨을 곳을 찾고 싶어질지라도, 난 흐르는 피를 닦고 일어나 걸을 것이며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외칠 것이다. “난 진정 그 남자를 사랑했었노라고.” 난 지금 무척이나 즐겁다. 오랜만에 주어진 여유 속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즐기고 있다. 많은 걸 잃었다 생각했는데 뜻밖에 더 큰 걸 얻은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 영혼의 자유다.

톰 행크스가 최후에 미소지었듯 나 또한 영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몇달 동안 힘든 내 자신을 정리하는 의미로, 또 내가 겪은 아픈 사랑의 얘기를 들려주고픈 욕심으로 어려운 결정 뒤에 책한권을 냈다(책 팔아먹으려고 커밍아웃한 거 아니냐는 의혹 속에서, 그것이 정말이라면 난 완벽한 바보요, 개자식이다. 하지만 <씨네21>이라는 대단한 잡지에 이런 글로 조그마한 광고효과를 노리는 속마음은 진심이다). 오해없이 <필라델피아>를 보며 저럴 수도 있구나, 했던 느낌으로 읽어주시면 극히 감사하겠고 새해에는 모두에게 한 가지씩이라도 큰 행운이 있기를, 욕심을 낸다면 나에게도 언젠가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하는 커다란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아, 이 기회에 나에게 힘을 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인권단체와 동성애단체들뿐만 아니라 나의 커밍아웃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결국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주신 모든 보통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필라델피아> 비디오를 돌려줄 때, 난 모자를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