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은 복수하고 싶을 때가 있다. 도저히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참는다. 아니 참아야 한다. ‘문명’ 사회의 법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사회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죽어서 하면 될까? 다카하시 쓰토무의 <스카이 하이>는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으로 떠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혼이 돼서 현세를 떠돌거나, 현세의 인간을 저주하며 죽이는 거나.’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유혹이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스카이 하이>의 세계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움직인다. 누군가를 죽이면 지옥에 가야만 한다. 복수를 하는 대신 영원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가치있는지, 이성적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복수를 택하는 이들은, 대개 이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감정의 폭주 때문에 움직인다. 그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스카이 하이>는 죽음과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철학과 선택의 파노라마다.
저승의 문지기인 이즈코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본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억울하게, 어처구니없게 때로는 한심하게 죽어버린 그들을. 선택을 해야 하는 12일의 시간 속에서, 이즈코는 조언을 해준다. 지극히 차갑고, 객관적인 조언을. ‘자기 결단이었는데도 살아 있는 인간을 질투하고 있어. 인간은 말야. 태어나는 것도 택할 수 없지만, 죽음도 마찬가지야’, ‘당신만이 아니야. 인간은 다 고독해. 인생은 고독과의 싸움이야’, ‘당신도 비슷했잖아. 인간은 다 왜곡돼 있어’, ‘핑계대지 마. 선택한 건 당신이야’, ‘현세에서 기쁨을 얻는 건 살아 있는 인간의 특권이야. 넌 죽음을 택했으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다카하시 쓰토무가 바라보는 세계는, 지옥도다. 하지만 그걸 비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단지 비정하고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이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도 쭉 이런 느낌이었어. 차갑고, 외롭고.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난 도저히 모르겠어. 살아 있어서 뭐가 즐거운지 말이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따스하고, 즐겁고, 밝은 것을 원하지만, 세계와 인간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왜곡되고 모순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스카이 하이>가 점점 거듭될수록, 죽음과 복수를 거듭할수록 긍정적인 시선이 많아지는 걸 보면, 다카하시 쓰토무의 길이 맞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