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고양이를 키운다, 는 말 때문에 연상이 튀다가….
우선은 ‘키운다’는 말이 목에 걸린다. ‘키우다’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자라게 하다’, ‘크게 하다’ 등의 뜻인데, 새끼 때부터 데려와서 지금은 큼직해졌으니 키웠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미 다 큰 고양이들과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키운다’고 말하기는 좀 찜찜하다. 자주 쓰이는 다른 말로는 ‘기르다’가 있다. 역시 사전적으로는 ‘먹이고 보호하여 자라게 하다’인데, 다 자란 고양이를 계속 ‘기른다’고 말하기는 역시 뭣하다. ‘데리고 산다’ 정도가 가장 맞춤한 말인데, 많이 안 쓰는 말이라 그런지 입에 잘 붙질 않는다.
‘애완동물’이라는 말도 좀 그런 것이 본래 ‘애완’이라는 말에는 ‘놀음거리나 구경거리로 삼아 보거나 즐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우리집 고양이들을 놀음거리나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집 고양이들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일각에선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쓰는 모양인데 역시 어색하다.
언어보다 삶이 대체로 먼저 변한다는 점에서 어휘에는 과거의 사고방식이랄까, 하는 것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 윗세대들에게 있어 동물이라는 것은 ‘어린 것을 데려와 잘 키워 잡아 먹’는 것이었을 게다. 반면 맛은 없는데 모양은 예쁜 것, 이를테면 구관조 같은 것은 새장에 넣어 ‘애완’했을 것이다. 그외에는 소처럼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예외적인 동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어휘도 동물과 함께 마음을 터놓고 정을 나누며 동등한 관계로 살아간다는 뜻을 담아내질 못한다.
‘집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을 꺼내면 가장 자주 접하는 반응은 두 가지다. ‘고양이는 말을 안 듣잖아요?’와 ‘고양이는 은혜를 모르잖아요?(주인도 몰라보고)’다. 과연 이때, ‘말을 듣는다’의 뜻은 뭘까? 설마 ‘37 더하기 24는 얼마일까요?’ 같은 말을 알아 듣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고양이와 달리 개는 말을 듣잖아요’이고 좀더 정확히는 ‘개는 주인의 말에 복종하잖아요’가 된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에 비해 고양이는 정말 그 어떤 말도 잘 ‘안 듣는다’. 오죽하면, ‘개는 부르면 온다. 고양이는 메시지만 받고 오고 싶을 때 온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그런데 정말 인간의 ‘은혜를 알’고 복종하는 동물만이 인간의 밥을 얻어먹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사회의 다수라는 것을 나는 매번 깨닫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한국인은 은혜와 복종을 중시하게 되었단 말인가? 어쩌면 여기에 전세계적으로 드문 우리나라만의 ‘고양이 혐오’와 ‘개 선호’ 사상의 뿌리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종석이었던가. 한국어는 위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언어라고. 그의 말대로 우리말은 실로 섬세한 위계 체제를 가지고 있다. 극상의 높임말에서 최악의 하대까지. 군대에서 고참들이 일병 말호봉더러 ‘너 말 짧아졌다’고 윽박지를 때, 그 뜻은 ‘고참과 친해지면서 최상급 높임말이 차하급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처지와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조심스럽게 말의 위계를 조정한다. 이런 언어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선 위계 시스템을 벗어난 그 어떤 존재와 맞닥뜨릴 때 혼란을 느낀다. 혹자는 한국인이 영어사용자만 보면 주눅드는 이유를 거기서 찾기도 한다. 한국인이 보기에 미국인들은 대뜸 ‘반말’을 한다. 우리는 대뜸 반말을 하는 사람과는 싸움을 하거나 복종을 한다. 그러니 뭐가 원만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 역시 우리의 위계 시스템과 벗어나 홀로 당당하다. 복종은커녕 툭하면 냉큼 도망가기도 한다. ‘말을 듣’는 대신 고양이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몸을 부비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그런 순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양이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언어의 변경에서 배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