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해와 다름없이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아주 익숙한 기호들이 12월을 메우고 있습니다. 자선냄비, 캐럴송, 플래스틱 크리스마스 트리, 한두어개쯤 얻은 새해 달력… 그리고 송년회에 참석하라는 전화들…. 올해는 유난히 송년회가 많은 한해인 것 같습니다. 내 수첩에만 해도 작년 12월보다는 한결 많아진 송년회 약속들이 적혀 있습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경기가 살아나 주머니 사정이 나아진 사람들도 늘고 IMF로 인한 위기 의식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서이기도 하고, 한해의 바뀜뿐 아니라 세기의 갈림, 밀레니엄의 교체라는 생각 때문에도 송년의 느낌이 더 짙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송년회가 너무 잦거나 폭탄주로까지 이어지는 송년회로 인해 몸이 피곤해지고, 때로는 은근한 질투와 원한이 뿜어져 나오는 송년회로 인해 개운치 않은 감정이 드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삶에 매듭을 만들고 시간의 분할 속에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삽입하는 송년회, 따뜻하게 술잔을 건네는 송년회에는 각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송년회를 대신하여 <씨네21> 그리고 <씨네21> 독자들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까닭은 단지 한해가 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과 제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제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에 독자 여러분들은 새롭게 더 좋은 필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물러가는 인사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게 마침 한해가 끝나는 시점이니 때가 잘 맞아떨어지는 기분입니다.
어떤 분은 제가 연재를 중단하는 것에 대해 그래 진작 그랬어야 했어, 정말 잘됐군 하고 생각하겠지만, 혹 왜 그만 쓰느냐고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이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만 쓰는 이유를 말씀드리렵니다. 부끄럽게도 공부와 생각이 모자라 원고 마감이 다가오는데도 글거리를 마련하지 못한 때가 늘어가고, 가까스로 써놓고 보면 스스로 쓴 글에 답답증이 밀려올 때가 많아서입니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이 제게 보내는 이메일도 대부분 매우 따가운 것이 되어갔고 그런 글을 읽을 때는 마음뿐 아니라 몸마저 부끄럽게 달아오를 때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그래도 즐겁게 읽고 좋게 보아주는 독자들이 있겠지, 아무래도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 아니겠어,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그 정도 자기 위안으로는 사라지는 자신감을 다시 추스르기에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재 기간이 저에게 고통스런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칼럼이 엄격한 논증보다는 생산적인 가설을 제출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회학을 하니 논문을 쓰기도 하는데, 논문을 쓰는 일이란 저 혼자 앞질러 가는 생각들을 데이터로 붙잡아 침착하게 길들이는 작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제 생각의 뒷덜미를 잡아야 하는 논문에 비하면 칼럼은 생각이 제 속도로 풀려나가게 할 수 있는 해방감을 줍니다. 칼럼에는 글쓰기의 고통을 완화하는 유희의 공간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적극적으로 그 공간을 활용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 너무 엄숙하게, 때로 너무 교훈적으로 썼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놀 수 있는 공간인지 제 스스로 감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지식인연하는 습관을 떨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만, 변명을 하자면 <씨네21>에는 저보다 활달하게 잘 놀 줄 아는 필자들이 제법 돼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던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나고보니 더 놀았어도 됐는데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이제 제가 쓰던 칼럼을 두루 감싸고 있었던 분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칼럼을 연재해 온 김규항씨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김규항씨의 한국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는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늘 깊이 생각하는 재료로 삼았습니다.
조선희 편집장, 허문영 기자 그리고 구둘래 기자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다른 기자들분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늘 재미있게 읽었던 ‘이주의 한국인’을 쓰시는 이윤이 객원기자님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술 한잔을 부어 올립니다. 그럼 이만….